문경 양민학살사건(聞慶良民虐殺事件)은 1949년 12월 24일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주민들을 살해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을 말한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은 교통이 발달한 요즘도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돌아 찾아가야 할 정도로 깊은 산골 마을이다. 70여 년 전의 그 사건이 없었다면 세상 시름 잊고 전원생활하기에 잘 어울리는 곳이다. 사건 당시 석달마을은 전체 25가구 가운데 14가구가 채씨거나 인척인 평화롭기 그지없는 채씨 집성촌이었다. 이러한 산골 마을에 참극이 벌어진 것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해인 1949년 12월24일 정오쯤이었다. 국군 제3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장병 69명이 석달마을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첫돌도 지나지 않은 유아 5명과 12세 미만 어린이 26명 등 주민 86명을 학살하고 집 24채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정부는 1950년 공비 출몰에 의한 총살로 호적을 정리했다. 국군이 아니라 공비에 의해 마을 주민이 희생됐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심지어 "희생자들이 빨갱이였다"라고 왜곡되기도 했다.
한겨울인 1949년 12월24일 정오쯤 국군 복장에 중무장한 괴한 80여 명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 모두 마을 앞 논으로 나오라고 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주민들이 잘 응하지 않자 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 주민들을 논에 모이게 한 뒤 어떤 확인이나 조사도 없이 무차별 사격해 그 자리에 모인 주민 대부분을 숨지게 했다.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려줄 테니 일어서라고 한 뒤 다시 모이자 또다시 총격을 가했다. 두 번째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웃 동네에 갔다가 석달마을에 연기가 솟아오르자 급히 돌아온 주민들과 겨울방학을 맞아 일찍 귀가하던 초등학생들을 마을 뒤 산모퉁이에 모아놓고 사격하는 세 번째 학살을 했다.
세 차례의 무차별 사격으로 전체 주민 128명 가운데 81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10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중상자 중 2명은 날이 어둡기 전에 숨지고 2명도 그날을 넘기지 못했다. 1명은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숨져 모두 86명이 희생됐다. 여자가 41명, 15세 이하 어린이가 26명, 65세 이상 노인이 13명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문경경찰서와 산북면사무소 직원들이 찾아와 중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했다. 다음 해 1월17일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이 석달마을이 아닌 인근 김룡초등을 방문해 생존자들을 위한 구호품과 집을 지을 비용을 지원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 돈으로 다시 집을 짓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부는 직권으로 이 사건을 공비 출몰에 의한 총살로 호적을 정리했다. 마을 주민 누구도 믿지 못했고 군인들의 소속이나 만행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주민들은 4·19혁명이 일어난 다음 달인 1960년 5월 국회와 정부에 호소문을 전달하고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국회와 정부는 진상조사를 발표했으나 1961년 5·16 사태로 모두 중단되고 호소문을 만들었던 유족 2명만 3개월간 경찰서에 구금되고 말았다. 이후 군사정권이 이어지면서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는 분위기조차 형성하지 못했다. 유족들은 1993년 '석달마을 양민집단학살자유족회'를 만들어 31명의 이름으로 입법·사법·행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국회를 찾아가는 등 다시 진상을 밝혀줄 것을 각계에 요청했다. 그해 7월 문경군의회에서 진상조사를 시작했고 12월24일 첫 위령제를 지냈다. 1995년 지역 출신 국회의원의 주도로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여야 정쟁으로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다. 이처럼 진상규명이 진척이 없던 차에 유족들은 재미 사학자에게 부탁해 1998년 미국에서 미 극동군사령부의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 '석달마을 사건이 처음에는 공비들의 범행으로 보고됐다가 국군의 소행으로 확인됐다'는 문서를 입수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 진상규명과 해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대통령 등에게 보내고 특별법 제정을 청원했지만 여전히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경북도의회도 1999년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석달마을 사건을 조사했고 2004년 배상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2000년 전국 처음으로 진상조사와 피해배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의 헌법 소원을 냈다.
2006년 정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발족하자 유족들은 이곳에 조사를 신청했다. 위원회는 사건 발생 57년 만인 2007년 석달마을 사건이 국군에 의한 범행이라고 진실을 규정했다.
사건 당시 어머니 배 속에 태아로 있었다는 채홍달(72) 유족회 총무는 "빨갱이라는 억울한 누명은 벗었지만 국군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에 대한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희생 당한 주민들의 원혼과 살아남은 유족들의 아픔을 국가가 방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족회는 진상규명 노력과 함께 위령 사업도 펼쳤다. 유족회를 결성하면서 합동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석달마을에서 지내다 2001년부터 점촌역 광장으로 옮겨서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고 했다. 다시 마을에서 위령제를 올리고 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지난해는 이마저도 지내지 못했다. 더욱이 위령제를 산자락에서 지내다 보니 한겨울의 추위도 고난이었다.
2009년 문경시의 지원으로 학살 현장에 미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희생된 어린이 26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위령비를 세웠다. 그 옆에 여류 시인이 어린 혼을 위로하는 작은 시비도 세웠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위령비나 위령 시설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수많은 생목숨을 앗아간 뒤에 취해진 조치의 전부다.
유족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진실이 공식 결정되자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손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5년,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2011년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진실을 은폐하고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조차 게을리한 국가가 이제 와서 문경 학살 사건의 유족인 원고들이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며 시효 완성을 이유로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시하고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는 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결정을 한 2007년 6월부터 시작된다고 봤다. 이 덕분에 일찍 소송을 제기했던 유족 4명이 다소의 배상금을 받았으나 나머지 유족들은 아무 배상이나 보상을 받지 못했다.
참사의 화를 피해 살아남은 석달마을 유족은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현재 이 마을은 9가구 16명이 살고 있으며 유족은 12명이다. 사건 당시 생존했던 유족은 2명뿐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정부가 오히려 무고하고 선량한 국민을 학살한 사건이 석달마을 양민학살사건이다. 당연히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과 배상이 이뤄졌어야 했다. 유족회는 "다행히 뒤늦게나마 진실이 규명됐지만 배상이나 위령 시설 건립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며 그래도 정부만 쳐다보고 있다.(영남일보 전재, 위키백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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