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殺, Nanking Massacre)

nyd만물유심조 2021. 12. 7. 22:00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殺, Nanking Massacre)이란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으로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자행되었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일본군이 중국 만주에서 산둥성 지난을 거쳐 난징으로 진격 중에 약 30만 명을 살해하였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000명을 살해했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만 5337구(그 중 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였고, 그밖에 양쯔강에도 대량의 시체가 버려졌다. 학살은 기총(機銃)에 의한 무차별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학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약탈, 방화(시내의 약 1/3이 소실됨)도 횡행하였다. 피해는 중국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에도 또한 중국인 피난민을 구조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학교·교회 등도 약탈되었다.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명 정도이다. 일본 국내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한 학자가 약 9만 명 정도가 살해당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20~30만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난징 한 곳에서만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혹여 나중에라도 일본 극우들의 선동에 현혹될 수 있으니 주의하자.

제2차 세계대전 뒤의 극동군사재판에서 당시의 총사령관인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또 당시의 제6사단장 하세 히사오(長谷壽夫)를 포함한 여러 명이 난징의 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서 사형되었다.
그러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