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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1598년 12월16일 노량해전에서 달아나는 일본군을 추격하다 전사하였다.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아들 회와 조카 완이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곁에 있던 송희립이 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유해를 옷으로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했다. 이 전투에서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초계군수 이언량 흥양현감 고득장 등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고,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만나기 이전엔 부패했고 조선군 때리기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질 포악한 명나라 도독이었던 진린은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노야(老爺)께서 살아 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는가?” 하고 통곡했고, 그의 아들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의 지휘를 받으며 다른 명군과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공은 이제 우릴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 하고 통곡하여, 운구를 옮기는 데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순신 장군의 첫 번째 무덤은 1598년(선조 31년) 11월19일(양력 12월16일) 장군이 전사한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 인근 충렬사에 있었다. 장군의 무덤이 여기에 자리 잡은 이유는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도망가는 왜군을 추격하다가 왜군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후 육지로 옮겨져 누운 곳이 인근의 고현면 관음포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순조32년)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의 글로 노량의 관음포에 이충무공번몰유허를 세웠으며 마지막 해전을 치르다 전사한 노량에는 장군의 가분묘가 두번째로 세워져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무덤은 전사한지 80일 뒤인 1599년 운구되어 2월11일 충남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에 장사되었으며 그후 전사 16년 뒤인 1614년 어라산에 이장되었다. 돌아가신지 100일이 지나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야 고향땅에서 편히 눈을 감으신 것이다.
이 충무공은 사후 새롭게 평가받아 1604년 좌의정에 오르며 선무공신 칭호를 받자 후손들은 첫 장례가 전란 직후 예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졌다고 조정에 이장을 상소, 첫 장례가 이뤄진지 16년후인 1614년 일등공신에 걸맞은 크기와 이장절차를 거쳐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어 정조(1793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으로 또다시 오르면서 묘역에는 상석 및 향로석, 장명등을 비롯한 다양한 석물이 설치되고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 신도비가 세워지면서 격이 한껏 높아졌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이 충무공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더욱 활발해져 1908년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해 '성웅(聖雄)' 칭호가 붙여진데 이어 제3공화국 시절 역사상 최고조의 평가에 오르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곡장)이 처지고 홍살문이 세워지는 등 왕가의 무덤(園)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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