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공격(眞珠灣攻擊, Attack on Pearl Harbor)은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제국 해군 비행기들이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군 기지에 가한 기습공격이다.
1938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을 공격했던 일본은 뚜렷한 경제적 이익을 거두지 못하자 유럽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수중에 넣고 싶어 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영국이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반도에는 일본의 산업 경제에 필요한 원료인 주석과 고무, 그리고 석유가 있었다. 이 지역을 빼앗아 제국(帝國)에 병합할 수 있다면 사실상 경제 자립을 이룩할 수 있을뿐더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은 이미 1940년대 말부터 태평양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전쟁지도의 대강과 주요 작계를 수립하여 완성해 둔 상태였다. 즉 미국과 영국 및 네덜란드 세력을 아시아로부터 몰아내고 중국의 문제를 종결지어 대동아 공영권을 형성하고 이후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미얀마 방면으로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도상연습을 거쳐 검토 후 보완되었으며 1941년 11월 5일 일왕의 재가를 받았다.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1941년 여름이었다. 이 계획은 당시 세계 3위의 해군 전력을 지휘하던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발상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미국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과 싸우는 것은 애초에 무리라고 생각하여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였던 인물이었고 이 때문에 일본 육군 내부의 강경파들이 그를 암살하려고까지 모의까지 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단 공격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초전에 미 해군의 주력함대를 파괴하는 것이 승부의 관건이라고 확신하였으나 처음부터 미국의 해군과 함대결전을 벌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하여 기습작전을 통해서 원하는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미국 해군의 주요 기지인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초토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동료들은 한결같이 잠수함과 함정으로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항공기에 의한 공습으로 끝까지 고집을 부리게 되면서 진주만에 대한 타격은 항공모함의 항공기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킨 아마모토는 진주만의 공격에 앞서 수심이 12미터인 진주만의 수심을 감안, 뇌격기의 어뢰에 목재 날개를 부착하여 공중 투하시 수심 10미터 아래로 어뢰가 내려가지 않도록 개조하였으며 오니시 소장을 불러 하와이 진주만의 공격계획을 비밀리에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수역이 좁고 항만 배후에 급경사의 산이 있는 오하후 섬과 유사한 가고시마 부근에서 급강하 폭격에 대한 맹훈련을 5개월 동안 실시하였다. 11월 7일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부대의 지휘관으로 나구모 해군중장을 임명하였다. 항공모함 아카키를 기함으로 한 기습부대의 함정들은 한척씩 몰래 몰래 미국의 감시망을 피하는 방식으로 항구를 빠져나와 11월 22일 쿠릴열도 남단에 있는 에트로프 섬의 탄칸 만에 집결하였다. 11월 25일 출동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면서 11월 26일 06:00 출항한 나구모의 함대는 3천여마일이 떨어진 진주만 인근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나구모 함대의 구성은 항공모함 아카키, 카가, 히류, 소류, 쇼카쿠, 즈이가쿠 6척과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구축함 11척, 유조선 8척 및 잠수함 3척으로 구성되었으며, 항공기는 전투기, 수평폭격기,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 등 432대가 동원되었다. 또한 나구모의 본대보다 앞서서 27척의 잠수함들이 먼저 은밀히 하와이로 향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미일협상이 결렬되자 일본 정부는 12월 1일 개전을 결의하였다.
-개전상황
1941년 12월 7일 오전 6시,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일본 기동부대는 오아후섬 북방 230해리 해역에 도달했다. 곧이어 전투기 183기를 발진시켰다. 첫 공격은 오아후 섬에 접근하면서 비행중인 미국 민간 경항공기 포함 항공기 몇 기를 공격해서 격추했다. 격추당한 비행기중 한 대는 경고 무선을 보내기도 했다. 곧이어 7시 49분. 일본 전투기는 진주만 상공에 도달했다. 오전 7시 49분. 후치다 비행총대장은 전군 돌격을 명령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도쿄시간으로는 12월 8일 오전 3시 19분이었다. 오전 7시 53분 비행총대장의 명령으로 후방 전신석에 앉은 통신사 미즈기 토쿠신이치 1등 비행병조장은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그 유명한 암호명 "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를 사령부에 발송하였다. 해당 암호는 호랑이란 뜻도 있지만 사실은 돌격을 뜻하는 '토츠게키(突撃)' 와 뇌격을 뜻하는 '라이게키(雷撃)' 의 가타카나 표기 맨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며, 단지 우연히 호랑이를 뜻하는 단어와 같은 뜻이 되어 인상깊게 남았다. 항공기에 탑재된 소형 전신기의 출력으로는 3000해리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모함인 항모 아카기는 물론, 도쿄 대본영에서도 직접 수신했다고 한다. 7시 55분. 다카하시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51대는 두 팀으로 나눠 있었다. 대장이 직접 이끄는 쇼카쿠 대는 히컴과 포드 섬 양 기지를 공격하고, 사카모토 아키라 대위가 이끄는 즈이카쿠 대는 휠러 기지를 공격하였다. 7시 57분. 무라타 소좌가 이끄는 뇌격대는 전함 USS 웨스트버지니아에 첫 어뢰를 명중시킨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어뢰 공격을 하였다. 8시 정각. 비행총대장이 이끄는 수평폭격대 50대는 10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에는 9대가 각 1발씩 발사하면 1발쯤은 맞추겠지. 하는 생각으로 9대가 1개 팀이였지만, 명중률의 상승으로 5대면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1개 중대 5대 편제였다. 비행총대장이 소속된 제1중대가 포드 섬 동측 계류장 가장 북쪽에 있던 전함 USS 네바다에 명중탄을 쐈다. 그 순간 제2중대가 북쪽에서 2번째 위치한 전함 USS 애리조나의 2번 포탑에 명중탄을 쐈다. 화약고가 위치한 자리라 대폭발이 일어났다. 다른 전대에 진동이 올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이어 3번째 위치한 USS 웨스트버지니아와 테네시도 타올랐고, 4번째 위치한 USS 오클라호마와 USS 메릴랜드와 5번째 USS 캘리포니아도 타오르며, 포드섬 동측 계류장 북쪽에 계류되어 있던 전함 8척 중 무려 7척에 명중탄이 났다. 포드섬 남쪽에서는 전함 USS 펜실베니아 함만 타격을 입었다. 8시 30분. 이타야 소좌의 제공대는 적 전투기가 나타나지 않아 할 일이 없었다. 이에 6개 반으로 나눠 각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미군 항공기들도 공습 와중에 간신히 일부가 이륙, 반격에 성공했다. 일제 공습 실시간으로 총 8대가 떠올라 6대가 한기 이상의 일본기 격추에 성공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먼저 해리 브라운 육군 소위가 P-36을 타고 이륙하여 휠러 비행장에서 이륙한 육군 제46전투비행대대의 말콤 무어 육군 소위와 짝을 이루어 일본기를 요격, 브라운 소위는 이 과정에서 오아후 섬 북쪽에서 일본기 1기를 격추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조종사로서 최초의 격추를 기록했다. 뒤이어 오아후의 북쪽에 있는 할레이와 육군 비행장에서 육군 제 47전투비행대대 조지 웰치 소위와 케네스 테일러 소위가 탑승한 P-40 전투기가 이륙하여 에바 해병대 비행장 부근에서 일본 해군기와 조우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2대를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1기를 격추했다. 휠러 비행장에 내려 무장과 연료를 채우고 다시 이륙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2기 추가로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추가로 1기를 격추했다.
8시 40분.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 2파 공중공격대 167대가 도착하였다.
폭격을 받아 전투기들이 파손된 휠러 비행장에서 핑크색 잠옷바람의 필립 라스무센 육군 소위가 다른 세 육군 조종사들과 함께 간신히 멀쩡한 기체에 무기를 장전하여, 8시 50분에 제 46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36A 전투기 4기가 이륙했다. 이들은 카네오헤 기지 상공에서 제로기 11기와 교전하여 제로기 2기를 격추하고 전투기 1기가 격추되었다. 일본기를 격추한 라스무센 소위는 기체에 500여발 이상 피탄을 맞아 기체 대부분의 기능이 고장난 채 불시착했으나 소위 본인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휠러 비행장에서는 이날 약 25회에 걸쳐 전투기들을 출격시켰다.
8시 54분. 제 2파에서 에구사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78대가 공격 개시하였다. 진주만은 이미 불바다여서 검은 연기가 자욱해 목표물 확인이 어려울 지경이였다. 이때 1차 공격에서 살아남은 일부 미 군함이 대공포들을 발포하였는데 강하폭격대는 이 포격 불빛을 보고 공격하였다. 벨로우즈 육군 항공기지에 일본기가 공격해 왔을 때 제 44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 전투기 12대 중 3대만 발진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고 조지 화이트맨 소위는 이륙하다가 격추되어 전사, 한스 크리스티안 소위는 전투기 탑승 중 기총 소사를 받아 전사, 새뮤얼 비숍 소위도 이륙 직후 공격을 받아 격추되어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해안까지 헤엄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2파 대장 시마자키 소좌가 직접 이끄는 수평폭격대 54대는 히컴 해군 비행장 격납고, 일부는 포드 섬과 카네오헤 격납고를 공격하였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지만 20대가 탄환에 맞아 반복 공격시에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2파 신도 사부로우 대위의 제공대 35대는 1파의 제공대와 마찬가지로 할일이 없자 미군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1, 2파 전투가 모두 끝나고도 비행총대장 후치다의 기체는 계속하여 진주만 상공을 돌고 있었다. 전과 확인 때문이였다. 전과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공격해오는 미군기는 단 1기도 볼 수 없었다. 귀환한 후치다는 일단 전함 4척 격침은 확실하며 나머지 4척도 대파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피해상황
일본의 기습공격이 미군의 전력을 궤멸하지는 못했다.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 3대는 공격 당시 진주만에 없었기 때문에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8척의 전함 가운데 애리조나호와 오클라호마호를 제외한 6척은 수리되어 복귀했다. 즉 BB-37 오클라호마는 20분 만에 전복, 비슷한 시간에 BB-48 웨스트 버지니아도 여러 발의 폭탄과 어뢰를 맞았지만 전복은 면했고, BB-38 펜실베니아, BB-43 테네시, BB-46 메릴랜드는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진주만의 상징인 BB-39 애리조나도 여러 발의 폭탄을 맞고 있었는데, 철갑탄이 탄약고 안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유폭으로 인해 아예 배가 두 동강이가 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폭발은 가까운 곳에 있던 BB-44 캘리포니아에도 영향을 주어 침몰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의 피해는 군인 2,334명 사망, 1,143명 부상, 민간인 103명 사상,
전함 4척 침몰, 1척 좌초, 3척 손상, 순양함 3척 손상, 구축함 3척 손상, 기타 함선 2척 침몰, 1척 좌초, 2척 손상, 항공기 188대 상실, 159대 손상 등이다.
반면, 일본은 항공기 29기 손실, 74기 손상, 갑표적 4척 침몰, 갑표적 1척 좌초, 전사 64명, 포로 1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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