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독립문의 건립

nyd만물유심조 2021. 11. 15. 20:31

서울 獨立門은 1896년 11월21일 정초식을 갖고 착공되어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서재필의 원작을 배경으로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흔히 Sabatin 사바틴)이 설계했고, 심의석이 시공 감독하였다.

높이는 14.28m, 폭 11.48m,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다. 현판은 김가진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인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다.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도 남은 부분이다. 독립문의 기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이 중 김가진은 삼전도(정축하성)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현재의 독립문은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고, 2009년 10월 28일에 서대문 독립공원의 재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동시에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독립문이 세워질 당시 국내 정세로는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내정의 혁신을 꾀하고,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의 내정간섭에 의한 상부의 정치개혁에 불과한 불완전한 것이었다.
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기로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수구파(守舊派)와 개화파(開化派)의 연립정권이 성립되어 일제의 침략세력은 일단 견제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의 이권침탈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아울러 집권층의 외세 의존적 자세와 보수 반동적 경향으로 정국은 더욱 혼미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팽배해져 갔으며 자강 개혁을 전제로 한 내정개혁을 요구하는 등 자주독립을 향한 민중의 의지가 날로 심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19세기 말 청국, 일본, 러시아 등 외국 열강의 간섭이 나라의 자주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민생은 국왕이나 대신들의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존하려는 고식적(姑息的)이고 무능한 시책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떤 나라의 어떤 간섭도 허용치 않겠다는 자주독립의 결의가 팽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독립문 건립을 발의한 것은 서재필(徐載弼)이었다.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뒤 미국에 망명하였다가 1895년에 귀국하여,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던 것이다.

•영은문(迎恩門) :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모화관(慕華館) : 1407년(태종 7) 송도의 연빈관을 모방해 서대문 밖에 건립하고 모화루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