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마카오의 중국 이양

nyd만물유심조 2021. 12. 16. 19:45



마카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로 1888년에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99년 12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양되었다.
마카오는 본래 광둥성 샹산 현(香山縣, 현 중산 시 일부)이었으나 1553년 (명나라 가정(嘉靖) 31년), 포르투갈의 현지 관리가 화물이 젖어서 육지에서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뇌물을 주고 마카오 체류를 인정받았고, 4년 뒤부터는 뇌물을 매년 건네면서 본격적으로 마카오에 눌러앉게 되었다.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도 매년 500냥의 지대(地代)를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거주권을 인정하였다. 해적 정벌을 원조한 공적으로 포르투갈인에게 마카오 거주권을 주었다는 설(說)이 있으나 이것은 18세기에 포르투갈인이 창작한 이야기라고 한다. 
처음 정착할 당시 포르투갈인이 도교 사원인 마쭈거(媽祖閣) 근처에 살았는데, 현지인에게 그곳의 지명을 물으니 현지인은 사원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착각하여 "마쭈거"라고 알려주었는데, 이를 잘못 알아들어 마카오라고 부른 것이 현재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마카오는 금, 은, 도자기, 아편 등의 중개 무역과 기독교 포교의 기지로서 번영했다. 포르투갈과 청나라가 체결한 1887년 리스본 의정서, 1888년 청-포르투갈 통상 우호 조약에 따라 마카오는 정식으로 포르투갈령이 되었지만, 영국이 홍콩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무역항은 쇠퇴하게 된다.
1966년 폭동을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하면서 1986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마카오를 이양하는 교섭이 시작되어, 이양시기를 1999년 12월 20일로 하는 협정이 1987년 중화인민공화국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되었다.

1993년 3월 "마카오 특별행정구 기본법(澳門特别行政區基本法)"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에서 채택되어, 1999년 12월 20일에 포르투갈로부터 이양되었다. 1999년까지는 총독이 최고의 통치 관직이었다. 현재의 마카오는 일국양제를 정한 기본법에 의해 2049년까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경제 체제 지속이 보장되고 있다.
처음 포르투갈이 차지했을 때는 중국본토와 떨어진 섬이라서 해협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수백 년간 퇴적을 거쳐 말 그대로 '반도'가 되어버린 마카오 반도와 그 남쪽의 타이파 섬, 콜로안 섬의 두 섬까지 마카오는 크게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에는 타이파 섬과 콜로안 섬 사이 지역을 매립해 두 섬이 사실상 붙었고 그 매립지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카지노와 호텔이 지금도 들어차고 있다.

-포르투칼령이 된 과정.
15세기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식민지들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은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를 넘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적극 진출했고, 마카오에 오기 앞서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로 도교빠(...)라 불릴 정도로 신비주의에 탐닉한 '가정제' 황제는 불로장생에 집착해 채향사(採香使)들을 시켜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는데, 때마침 전세계에 연락선이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은 용연향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 황제와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한편 명나라는 언젠가 서양 국가들과도 교류를 하고싶어했는데 이 기회에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기위한 창구로 써먹을 생각으로 무역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1557년부터는 포르투갈 측에선 매년 명나라 황제와 장군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이후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에 포르투갈이 매년 500냥을 세금 명목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체류를 공식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연안에 왜구나 중국인 해적들이 들끓어서 국가 제정이 자꾸만 나가고 있어서 짜증이 났었는데 이때의 마카오는 일개 작은 섬에 불과한지라 포르투갈이 매년 거금의 세금을 명나라에게 바치니까 명나라 황제로서는 오히려 땡큐였던 것이다. 그 이후 영구 임대안을 승인했으며 정식으로 임대된 후엔 뇌물이 아닌 정식 임대료, 즉 명나라 황제에 대해 세금을 지불하고 대신 마카오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이때만 해도 법적으로 포르투갈에 주권이 이양된 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국력의 한계 때문에 명나라 본토 침공을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화기로 무장한 대군에게 포위되어 궤멸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마카오 내 중국인들의 처우에서도 드러나는데, 다른 지역 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징집하던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서만큼은 이런 행동을 자제했다.
1842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박살내자 서양 열강들이 청나라를 점점 호구로 보기 시작하고 청나라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수많은 이권을 뜯어냈다. 포르투갈도 이에 편승해 1851년과 1864년에 원래 마카오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무인도인 타이파와 콜로안을 점거하고 1887년에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마카오를 정식으로 포르투갈 영토로 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