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李奉昌)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무부대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첫 번째 단원으로서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였고, 비록 실패했으나 이 거사를 통하여 한국 민중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의 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려 이후 강력한 항일투쟁에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졌으나 거사는 실패했다. 체포된 이 의사는 도쿄 형무소에 수감됐다. 9월 30일 도쿄 법원에서 350여 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열린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날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호외에 이 의사의 옆얼굴이 실려 있다. 열흘 뒤인 10월 10일 교수형으로 순국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당시 이 의사는 미혼이었다. 위 사진을 보면 상당히 수척한 얼굴이다. 심한 문초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호외에는 이 의사의 생가 사진과 도쿄 숙박지에 남긴 이 의사의 필적 사진도 함께 실렸다.
이 의사의 의거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함께 일제시대 ‘3대 의열 투쟁’으로 꼽힌다. 이 의사는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일하다 학대를 받았고, 만주의 남만 철도회사에서 운전견습을 하다 ‘조센진’이란 수모를 당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자극 받은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어를 배우는 등 6년 넘게 일본을 익힌 뒤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비밀리에 백범 '김구'를 만난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백범은 이 의사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동생 집으로 갔다. 이 의사는 거기서 태극기를 앞에 두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일왕에 대한 저격을 선서했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한 일왕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당시 침체했던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불을 지폈다.
-거사경위.
이봉창의 거사는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폭탄 준비는 중국군으로 복무하며 상하이병공창(上海兵工廠) 병기주임을 맡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이 담당하였다. 거사를 위한 자금은 김구가 재미 한인교포들과 독립운동단체에 편지를 발송하여 마련할 수 있었다. 1931년 12월 13일 김구는 이봉창을 만나 거사 준비가 다 마쳤음을 알렸다. 그리고 중국 지폐로 300불을 주며 일본에 갈 여비와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구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이었던 사진관에 이봉창을 데려 가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인애국단 선서문을 목에 걸고 양손에 거사에 사용할 폭탄을 들고 사진을 촬영하였다. 다음날부터 이봉창은 상하이 생활을 정리하는 한편 김구와 세밀한 거사 계획을 논의하고 폭탄 사용법 및 휴대방법,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의 대응법 등에 대해서 숙지하였다.
12월 17일 이봉창은 몸에 폭탄을 숨기고 배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19일 고베를 거쳐 22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12월 28일 그는 신문에서 이듬해 1월 8일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있을 육군 관병식(觀兵式) 행사에 일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와 함께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는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1월 8일에 꼭 상품이 팔릴 것’이라는 전보를 작성하여 김구에게 발송하였다. 거사 결행 일을 알리는 전보였다.
1월 8일 이봉창은 일왕이 하라주쿠(原宿)를 지나 요요기 연병장으로 지나갈 때 거사를 결행하려고 했으나, 연병장 주변 경계가 너무 심하여 욘타니미츠케(四谷見附)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신문팔이 소년에게서 일왕이 사카타니미츠케(赤坂見附)를 통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갔지만, 일왕 행렬은 이미 지나간 후였다. 그래서 일왕이 환궁할 때를 기다렸지만, 이마저도 놓치고 거사의 실패를 낙담하였는데 뜻밖에도 일왕의 환궁행렬이 우회하기 때문에 지름길로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주변 사람의 말에 따라 급히 사쿠라다문(櫻田門) 앞 경시청(警視廳)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일왕 행렬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에 섞여서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44분 일왕이 탔을 것이라고 생각한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두 번째 마차는 일왕이 아니라 궁내대신(宮內大臣)이었던 이치키 기도쿠로(一木喜德郞)가 타고 있었고, 그나마 수류탄도 예상보다 화력이 약해서 두 번째 마차의 밑바닥과 바퀴에 약간의 손상과 바로 뒤를 따르던 말에 약간의 출혈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자진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이봉창은 1932년 6월 27일까지 총 9차례의 예심신문(豫審訊問)을 받았다. 공판은 9월 16일부터 9월 30일까지 진행되어 ‘대역죄’의 명목으로 사형을 언도받아 10월 10일 이치타니(市谷) 형무소에서 오전 9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광복 후 김구가 1946년 일본 정부에게서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에 윤봉길 의사 등과 함께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20년 10월 효창동에 이봉창 의사의 기념관이 세워졌는데 그의 고향이 용산구임을 반영한 것이다. 기념관의 이름은 '이봉창 역사울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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