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nyd만물유심조 2022. 1. 13. 20:11



사진설명 : 2012년 1월14일 오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열린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서 87년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복역하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고인의 고문 치사사건 축소은폐 시도를 제보하고, 외부로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 안유 보안계장(왼쪽)과 한재동 교도관(오른쪽)을 소개하고 있다.



1987년 1월14일 대공수사단 서울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 수사관들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 학생을 심문하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케 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10·28 건국대학교 항쟁 진압 이후 의기양양하여 '반제동맹당 사건'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이하 ML당) 사건' 등의 공안조작 사건들을 만들어내며 소위 '얼음정국'을 조성하던 시기였다. 그런 혹한 속에서 떨고 있었던 1987년 1월 14일,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피해자 박종철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하여 1985년 10월에 터진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했으나 박종철은 모른다고 했다. 이에 과민반응한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반복했다.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올려 또 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결국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의식을 잃었다.
경찰 측이 부랴부랴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의 의사를 불러왔는데, 의사의 언론 증언에 의하면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한다. 당황한 수사관들은 사건 은폐를 위해 대공분실 부근의 용산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당시 사망을 최초 확인한 오연상 당시 중앙대학교병원 부속 용산병원 내분비내과 전임강사는 회고하기를 "당시 우연찮게도 왕진이 가능한 내과의사는 나뿐이었고, 박종철은 우연의 일치로 왕진 요청 전에는 살아 있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왕진 요청이 올 일이 없었기에) 도착 당시 사실 정황상 불필요한 가혹행위가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태였지만, 일단은 바로 사망선고를 내릴 수는 없었기에 심폐소생술을 약 1시간을 진행했고, 그래도 박종철의 상태가 변하지 않자 경찰이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이에 오연상은 '용산병원으로 가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형사들에게 "미리 준비를 위해 응급실에 전화해야 한다"고 말했고, 경황이 없던 수사관 5인방은 그냥 전화를 허락했다. 오연상은 응급실에 전화하여 "이 환자는 병원으로 가면 안 된다, 응급실장이 막아달라"고 전했고, 응급실장 뿐 아니라 당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장 진료부장 등이 총동원되어 박종철의 시신의 내원을 막아, 시신은 국립경찰병원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고문치사 사건이 의료사고로 둔갑하여 은폐될 뻔한 사건이다. 형사들은 오연상에게 "사망진단서를 써 달라"고 했지만, 오연상이 도착했을 때는 손 써볼 틈도 없이 사망해 있었기에 사망진단서 대신 사체검안서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때 "환자의 사인을 모르기에 미상으로 썼고 부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했는데, 경찰이 이를 받아들여 이후 이 사실을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에게 전달하였고, 오연상은 검찰에 조사는 많이 받았으나 이미 신군부와 대공분실의 손을 떠났기에 그들은 오연상에게 손을 댈 수 없었고, 이 틈을 노려 한동안 병원에 휴가를 쓰고 잠적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박종철이 병원에서 숨진 것으로 조작하려 했으나,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기자 신성호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데스크에 보고하여, 그날 2단짜리 꼭지에 기사가 들어갔다. 이날 기사는 "학생이 남영동에서 죽었다"는 단신이었고, 1면도 아니고 사회면 한구석에 있었는데, 석간 강판 이후 신문이 배포되자 모든 신문사에서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 진위를 물었다. 이후 문공부는 중앙일보에 난입하여 깽판을 치고 갔다.

이후 소문이 퍼져나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 미사 때 내막을 폭로하는 바람에 은폐는 무위로 돌아갔고, 파문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경찰에서는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을 취조하던 중 사망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였다. 그러고는 증거를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려고 서울지방검찰청에 시신 화장 신청을 넣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은 서울남부구치소에 수감됐다. 당시 안유 구치소 보안계장은 이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그들 외에 추가로 경찰관 3명이 고문에 관여하였고, 경찰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안 계장은 마침 수감 중이었던 이부영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였고, 이 씨는 쪽지에 추가 관여 은폐사실을 적은 뒤 서로 친분이 있었던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전달토록 하였다. 해당 쪽지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까지 전달되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당시 물고문에 가담한 수사관들은 조한경, 강진규, 반금곤, 이정호, 황정웅 5명이다. 왼쪽 팔을 황정웅, 오른쪽 팔을 반금곤, 다리는 이정호가 잡았고 강진규가 박종철의 머리를 욕조에 담갔다. 조한경은 고문을 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