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청와대를 향한 1.21 사태, 김신조 사건

nyd만물유심조 2022. 1. 21. 22:54







1·21 사태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1월 17일 밤 휴전선을 넘은 무장공비들은 21일 밤 9시 30분경에 서울 청운동 세검정 부근, 청와대 앞 500미터까지 진출하였다. 창의문 근처에서 있었던 경찰의 불시검문에 불응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무장공비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잡기위해 비상경계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군경합동 소탕작전을 버린 결과, 31명중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북으로 도주하였으며 1명이 생포되었다. 그 와중에 민간인을 포함해 32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684부대가 창설되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대통령 경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북한은 사건관련성을 전면 부인하였으나 생포된 김신조는 방송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말해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복수를 위해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하였으나 계획이 취소되며 무관심속에 부대원들을 방치하였는데, 그 결과 71년에 '실미도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 사건 상황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한다. 당시 1월 21일은 일요일로서 6.25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주기 위해 날짜를 계산하고 투입한 것이다. 겨울에 투입한 이유도 국군과 주한미군이 겨울에는 훈련도 잘 안하고 추위로 인해 근무도 대충 선다는 이유에 날짜를 겨울로 계산한 것이라고 한다.
19일 14:00 즈음 124 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쳤고, 이에 북에 무전을 쳐서 어떻게 할지를 물어봤으나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하여 몇가지 이유를 들며 투표를 통해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나무꾼 형제를 살려주기로 하되,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북에서 큰 포상을 받게 해주겠다"라며 행로를 북으로 알려주고 풀어주었다. 집에 온 나무꾼 형제들은 저녁식사를 하며 덜덜 떨다가, 가족들이 무슨 일이냐 묻자 바로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공비들을 신고하였고, 파출소에서 경찰서를 거쳐 미군과 국군에 통보되어 즉각적인 경계태세가 발령되었다. 국군은 유류품과 비트 잔여물을 확인함으로서 발언의 신뢰성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하여 공비들의 행로를 추적, 이들이 서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미군 경계지역에 대한 작전권까지 이양받으며 신속하게 북한산과 서울시에 대규모의 병력을 배치한다. 또한 철도, 군 인사에 대한 암살 등 다대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서울 시 외곽과 경복궁 등 요충지에 병력들을 긴급히 배정, 증파하고 있었다. 즉 대한민국의 대응은 결코 늑장대응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동속도가 국군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빨라 공비들은 차단선을 빠져나왔다. 산악지형에서 무려 시간당 10km의 속도로 질주했던 것이다.
이들은 낮에는 쉬고 밤에 이동하는 등 산으로 침투하면서 이목 자체를 최대한 피하다가, 침투용이던 26사단 마크가 달린 국군 군복을 입고서도 마주친 나무꾼 4형제에게는 방첩대나 국군이라고 속이지 않고 오히려 연이은 침투성공에 기고만장하여 자신들이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선봉대라고 알려주었다. 이후 21일 시내 돌입 전 사복으로 환복하고 코트 아래 기관단총 등의 장비를 갖추어 19:00 경에 서울 시내에 진입하였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군, 경 검문시 방첩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시간이 21일 19:00 경 부터인데, 이 때 우리 정부는 이들의 목적이 대통령 암살인 것은 예측하지 못했기에 청와대 자체 경계는 오히려 소홀한 편이었다. 그러다가 제 2 방어선이던 경찰이 공비침투에 대비하여 서울 시내를 순찰/검문하고 있다가 천만다행으로 탐지한 것이다. 공비에 대비하여 순찰하다가 복귀하던 서대문경찰서 이각현 서장이 직접 21:55 경에 2열종대로 둘 셋씩 붙어가던 이들을 발견하였다. 이 서장은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즉시 시 경찰망에 무장공비 의심 전파하면서 관계기관에 훈련 있는지 확인, 헌병 3명 포함 병력 14명을 소집하여 짚차 2대, 트럭 1대에 태워서 차량 추적을 명령하고 30사단 작전참모에 동원병력 소집할 것을 요구하여 이에 따라 22:00부로 해당 구역에 병력 배치가 시작되었다. 무장공비들이 이 추적을 따돌리고서 마주친 최초의 검문소가 바로 후술할 두 형사가 있는 곳이다. 22:05분에 본인들은 CIC 소속으로 훈련 복귀중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했으나 형사들은 뭔가 수상하다고 낌새를 눈치채고 시간을 끌다가 코트 속 총기를 식별하였다. 따라서 최소한 침투 과정에서 CIC라면서 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자하문 초소에 당도한 124 부대원 31명은 9시 50분에 드디어 이곳을 지키던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2명에게 검문을 받게 된다.부대원들은 "우리는 CIC (당시 육군 방첩부대)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 고 다그쳤지만 형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시간이 지체됐고 무전으로 연락을 받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경찰 병력이 그들의 진군을 막아섰다.이때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이를 군의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하여 벌인 일이라는데 사실은 그냥 시내버스였다. 시간도 야간이라 헤드라이트 빛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도 않으니 패닉상태로 무작정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최규식 총경은 지근거리에서 총탄 여러 발을 맞아 현장에서 전사하였고 검문을 하며 시간을 끌던 형사 정종수 경사는 동료 형사와 함께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였으나 이후 후퇴하는 공비들의 총에 중상을 입고 이후 치료 도중 사망한다. 그 외에도 많은 경찰이 부상 당했으며, 버스에 던진 수류탄 때문에 시내버스 버스기사 포함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여기서 생포된 무장공비 김춘식 소위는 치안국으로 압송되어 무장해제를 받던 도중 실수로 수류탄 핀이 뽑히는 바람에 어처구니 없게 폭사했다.(결국 사살에 포함)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 생포되었다. 우리 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 과정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 건 발생하기도 했다. 결혼 예정이던 여성이나 경복중학교(현 경복고)의 수위 등 일반인, 심지어는 참관 및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 병사도 사망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의도가 있었든 아니었든 무고한 민간인들도 희생 당했다.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김신조의 자수?와 생포
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제30사단 92연대의 잠정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독립가옥에서 무장공비를 발견하였다. 상당한 교전을 주고 받다가 군에서 "나오면 살려준다"라고 회유하니 결국 무장공비 1명이 수류탄을 들고 나왔다. 자폭할 수도 있는데 그냥 떨어트리고 손들고 나왔다. 그가 바로 김신조 소위였다. 때문에 국방부 공식기록은 '생포'였고, 세월이 흐른 후 책이나 언론에서는 '투항'이나 '자수'라는 용어도 쓰인다. 정황상 어느쪽으로 봐도 맞는 듯하다 . 김신조는 아예 독립가옥에서 전투가 없었고 자신은 검문을 피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를 모두 드보크에 묻어두고, 자폭용 수류탄 한발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자수가 맞다고 말한다.
04시 15분경 김신조를 인계 받은 방첩대는 그를 보자마자 '무기는 어디에 숨겨뒀냐?'라고 물었다. 김신조의 직접 안내로 특공대원 25명은 전날 김신조가 매복했던 비봉 승가사 옆 200미터 지점에서 드보크를 찾아 침투 시의 일부 장비를 회수하였다. 이후에도 김신조는 정보 제공 등의 방법으로 공비 소탕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