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三一節)은 1919년 3월 1일(음력 1월 29일 토요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한반도의 민중들이 일본 제국의 지배에 항거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3.1 운동을 기념하는 날로서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매년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지정하여 국경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3.1 운동(三一運動)은 1919년 3월 1일부터 수 개월에 걸쳐 한반도와 세계 각지의 한인 밀집 지역에서 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점에 대하여 비폭력으로 저항권을 행사한 한민족 최대규모의 독립운동이다.
이미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만주와 연해주, 중국, 미국 등 국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인의 명의로 작성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외교가 아닌 전쟁을 통한 독립 쟁취였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독립을 위해 최후의 한 사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 2.8독립 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도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계기가 되어 국내에서도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 인사들은 천도교의 선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하고,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했다. 이들은 대외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청원하고, 대내적으로는 대중적인 비폭력 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종교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전국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흥선대원군의 탄압후유증(7천여명 천주교인 살해)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 당일상황및 경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다.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저녁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당에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한편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때, 성 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만세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고,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평양, 진남포, 원산 등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도 동시에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수많은 학교에서 동맹 휴학이 잇따랐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거나 운동자금을 제공했으며, 노동자들은 파업 등으로 만세 시위에 동참했다. 천안은 아우내장터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3월 중순을 넘어서자 시위는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는 시위가 절정에 달했다.
만세 시위는 재외 동포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만주, 연해주, 미주 지역, 일본 등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는 미주 지역 동포들이 모여 한인자유대회를 열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에서도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서간도에서는 부민단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전개했고, 북간도에서는 용정촌과 훈춘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열렸다.
일본 군경은 시위 군중을 총과 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거나 투옥했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에서는 일본군이 교회에 남자들을 모이게 하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으며, 교회 뜰에 있던 부녀자들을 학살하고, 교회를 불태웠다. 또한 인근의 민가 수십호에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의 한계를 깨달은 일제는 통치 방식을 소위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여기에는 무단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적극적인 저항과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작용했다. 일제는 부분적으로나마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글 신문의 발행을 허가했다. 이를 배경으로 1920년대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우리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여 민족운동세력을 약화하려는 수단에 불과했다. 일제는 현역 대장이 임명되었던 총독에 문관 출신도 임명될 수 있게 하였으나, 광복이 될 때까지 문관 총독은 단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다.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했으나, 한국인에 대한 탄압과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경찰의 수는 3.1운동 이전 보다 3배 이상 늘렸다. 신문도 검열 과정을 거치게 해 기사가 삭제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압수, 정간되기도 했다.
3.1운동은 독립을 위한 방향에 대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일제에 맞서 결사 항전하려면 전 민족을 대표할 조직이 필요했다.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 민족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통일된 지도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박은식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약 200여 만 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집계는 이와는 다른데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宣言書[한글화 적용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仗)하야 차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誠忠)을 합하야 차를 포명(布明)함이며 민족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 발전을 위하야 차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發露)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순응병진(順應幷進)하기 위하야 차를 제기함이니 시(是)이 천(天)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존 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 하물(何物)이던지 차를 저지 억제치 못할 지니라.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作)하야 유사 이래 누(累) 천년에 처음으로 이민족 겸제(箝制)의 통고(痛苦)를 상(嘗)한지 금(今)에 십년을 과(過)한지라 아(我) 생존권의 박상(剝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심령상 발전의 장애됨이 무릇 기하이며 민족적 존영의 훼손됨이 무릇 기하이며 신예와 독창으로써 세계 문화의 대조류에 기여 보비(補裨)할 기연(奇緣)을 유실(遺失)함이 무릇 기하이뇨.
희(噫)라! 구래(舊來)의 억울을 선창하려 하면, 시하(時下)의 고통을 파탈(擺脫)하려 하면, 장래의 협위(脅威)를 삼제(芟除)하려 하면,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염의(廉義)의 압축소잔(壓縮銷殘)을 흥분 신장하려 하면,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달을 수(遂)하려 하면, 가련한 자제에게 고치적 재산을 유여(遺與)치 아니하려 하면, 자자손손의 영구 완전한 경복(慶福)을 도영(導迎)하려 하면, 최대 급무가 민족적 독립을 확실케 함이니 이천만 각개가 인(人)마다 방촌(方寸)의 인(刃)을 회(懷)하고 인류 통성과 시대 양심이 정의의 군(軍)과 인도의 간과(干戈)로써 호원(護援)하는 금일 오인(吾人)은 진(進)하야 취(取)하매 하강(何强)을 좌(挫)치 못하랴, 퇴(退)하야 작(作)하매 하지(何志)를 전(展)치 못하랴.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 이래 시시종종(時時種種)의 금석맹약(金石盟約)을 식(食)하얏다 하야 일본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려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아(我) 조종세업(祖宗世業)을 식민지시하고, 아(我) 문화 민족을 토매인우(土昧人遇)하야, 한낱 정복자의 쾌(快)를 탐할 뿐이오, 아(我)의 구원(久遠)한 사회 기초와 탁락(卓犖)한 민족 심리를 무시한다 하야 일본의 소의함을 책하려 아니하노라.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오인(吾人)은 타(他)의 원우(怨尤)를 가(暇)치 못하노라. 현재를 주무하기에 급한 오인(吾人)은 숙석(宿昔)의 징변을 가(暇)치 못하노라. 금일 오인(吾人)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有)할 뿐이오 결코 타(他)의 파괴에 재(在)치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함이오 결코 구원(舊怨)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구사상, 구세력에 기미(覉縻)된 일본 위정가의 공명적 희생이 된 부자연 우(又) 불합리한 착오 상태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야, 자연 우 합리한 정경대원(政經大原)으로 귀환케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서 출(出)치 아니한 양국 병합의 결과가 필경 고식적(姑息的) 위압과 차별적 불평(不平)과 통계 숫자상 허식의 하에서 이해 상반한 양 민족간에 영원히 화동할 수 없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 실적을 관(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임을 명지(明知)할 것 아닌가. 또, 이천만 함분축원(含憤蓄怨)의 민(民)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소이(所以)가 아닐 뿐 아니라, 차로 인하야 동양 안위의 주축인 사억만 지나인의 일본에 대한 위구(危懼)와 시의(猜疑)를 갈수록 농후케 하야 그 결과로 동양 전국이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을 초치할 것이 명(明)하니, 금일 오인(吾人)의 조선 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영을 수(遂)케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사로(邪路)로서 출(出)하야 동양 지지자(支持者)인 중책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로 하여금 몽매(夢寐)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 공포로서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 문제이리오.
아아,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來)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장양(鍊磨長養)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始)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래(來)하야 만물의 회소(回蘇)를 최촉(催促)하는도다. 동빙한설(凍氷寒雪)에 호흡을 폐칩(閉蟄)한 것이 피일시(彼一時)의 세(勢)이라 하면 화풍난양(和風暖陽)에 기맥(氣脈)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此一時)의 세(勢)이니, 천지의 부운에 제(際)하고 세계의 변조를 승(乘)한 오인(吾人)은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아무 기탄(忌憚)할 것 없도다. 아(我)의 고유한 자유권을 호전(護全)하야 생왕(生旺)의 낙(樂)을 포향(飽享)할 것이며, 아(我)의 자족한 독창력을 발휘하야 춘만한 대계(大界)에 민족적 정화(精華()를 결뉴(結紐)할 지로다.
오등(吾等)이 자(玆)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이 아(我)와 동존하며 진리가 아와 병진하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古巢)로서 활발히 기래(起來)하야 만휘군상(萬彙羣象)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어도다. 천백세 조령(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 기운이 오등을 외호하나니 착수가 곧 성공이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으로 맥진(驀進)할 따름인뎌.
- 공약 삼장
하나, 금일 오인(吾人) 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하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하나,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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