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島山 安昌浩

nyd만물유심조 2022. 3. 6. 21:13


안창호(安昌浩 1878. 11. 9 ~ 1938. 3.10)는 독립운동가며 교육자로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며 1938.3.10 타개하였다.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초리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농부인 순흥 안씨 안흥국(安興國, 족보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과 제남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안치호(安致昊)와 형이 한명 더 있었고, 아래로는 그가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안창호는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 경신학교)에 입학해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눈떴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하자 낙향하여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교육자로 변신했다.
1902년 안창호는 교육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리버사이드에서 각종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고학 생활을 하면서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 등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귀국할 무렵인 1907년에는 지방회 7곳을 둔 북미 최대의 한인자치단체로 발전했다. 1907년 그는 불현듯 귀국해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라고 역설하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부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안창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1908년 안창호는 평양부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김좌진,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1907년에는 조선 통감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제의로 그와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모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도 함께 서양에 못지않게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다. 협조해달라." 하며 안창호를 회유했다. 이에 안창호는 "한국의 개혁과 발전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힘과 노력에 맡겨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서양의 간섭과 압력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근대화, 서양에 맞섬 등을 명목으로 한반도를 침탈하던 일본의 기만적인 실상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서북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 양성을 주장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운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다시 출국해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 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이후 흥사단은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을 거점으로 활동 중이다. 이후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안창호는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설립되려 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떠났는데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불행히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하였다.

-안창호의 사상은 민족 개조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개조란 더욱 좋아지게 하거나 잘못된 것을 고친다는 뜻이다.
그는 자주독립을 이루려면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에 따라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참됨에 힘쓴다는 뜻의 무실, 신의와 믿음을 뜻하는 충의,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뜻하는 용감, 실천의 중요성을 뜻하는 역행 등 안창호의 사상을 담은 단체인 흥사단은 지금까지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