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114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계기로 경술국치와 그로 인한 식민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11일 건립되었다. 독립 선언의 결과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창설하였다. 여기에서 국호와 정부형태, 임시헌법 등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제안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 다음 날인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하여 상해임시정부를 결성하였다. 임시의정원은 첫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는 한편..

역사이야기 2022.04.10

안중근 의사 서거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군인,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본래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

역사이야기 2022.03.19

島山 安昌浩

안창호(安昌浩 1878. 11. 9 ~ 1938. 3.10)는 독립운동가며 교육자로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며 1938.3.10 타개하였다.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초리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농부인 순흥 안씨 안흥국(安興國, 족보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과 제남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안치호(安致昊)와 형이 한명 더 있었고, 아래로는 그가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안창호는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 경신학교)에 입학해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

역사이야기 2022.03.06

삼일절, 3.1 운동

3·1절(三一節)은 1919년 3월 1일(음력 1월 29일 토요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한반도의 민중들이 일본 제국의 지배에 항거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3.1 운동을 기념하는 날로서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매년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지정하여 국경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3.1 운동(三一運動)은 1919년 3월 1일부터 수 개월에 걸쳐 한반도와 세계 각지의 한인 밀집 지역에서 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점에 대하여 비폭력으로 저항권을 행사한 한민족 최대규모의 독립운동이다. 이미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만주와 연해주, 중국, 미국 등 국외에서..

역사이야기 2022.02.24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6·25전쟁 중인 1951년 2월 7일부터 11일까지 5일 동안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작전명령 제5호에 따라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가현마을을 시작으로 방곡마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과 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 탄랑골, 박산골에서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사건이다.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은 3대대가 작전지역에서 705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2월 7일 오후 6시경 마지막 학살지인 서주리를 빠져나가서 함양군 생초면 어서리에 있는 생초초등학교에 저녁 8시경 도착하여 학살한 마을에서 끌고 온 가축을 잡아서 잔치를 벌이고 1박하였다. 다음 날에도 ..

역사이야기 2022.02.06

청와대를 향한 1.21 사태, 김신조 사건

1·21 사태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1월 17일 밤 휴전선을 넘은 무장공비들은 21일 밤 9시 30분경에 서울 청운동 세검정 부근, 청와대 앞 500미터까지 진출하였다. 창의문 근처에서 있었던 경찰의 불시검문에 불응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무장공비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잡기위해 비상경계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군경합동 소탕작전을 버린 결과, 31명중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북으로 도주하였으며 1명이 생포되었다. 그 와중에 민간인을 포함해 32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의 결과..

역사이야기 2022.01.2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사진설명 : 2012년 1월14일 오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열린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서 87년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복역하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고인의 고문 치사사건 축소은폐 시도를 제보하고, 외부로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 안유 보안계장(왼쪽)과 한재동 교도관(오른쪽)을 소개하고 있다. 1987년 1월14일 대공수사단 서울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 수사관들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 학생을 심문하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케 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10·28 건국대학교 항쟁 진압 이후 의기양양하여 '반제동맹당 사건'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이하 ML당) 사건' 등의 공안조작 사건들을 만들어내며 소위 '얼음정국'을 조성하던 시기였다...

역사이야기 2022.01.13

이봉창(李奉昌) 의사 일왕에게 폭탄투척

이봉창(李奉昌)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무부대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첫 번째 단원으로서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였고, 비록 실패했으나 이 거사를 통하여 한국 민중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의 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려 이후 강력한 항일투쟁에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졌으나 거사는 실패했다. 체포된 이 의사는 도쿄 형무소에 수감됐다. 9월 30일 도쿄 법원에서 350여 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열린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날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호외에 이 의사의 옆얼굴이 실려 있다. 열흘 뒤인 1..

역사이야기 2022.01.07

나석주 의사, 일제치하 경제착취기업에 폭탄 투척

나석주(羅錫疇) 의사는 일제치하인 1926년 12월28일 일본의 경제 착취 기업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사옥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에게 10발 가량의 총상을 입자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심문을 받다가 조선총독부 병원 수술대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순국했다. 나석주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에서 나병헌(羅秉憲)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25년간 나석주의 가문이 소유한 토지로 땅이 기름져 농작물이 잘 자랐다. 그런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나석주의 집안은 땅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지독한 수탈에 한 가족이 1년을 먹기도 힘들 정도로 사정이 나빠지자 격분한 나석주는 재령군사무..

역사이야기 202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