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 암살 사건

nyd만물유심조 2021. 10. 28. 18:18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가 자신의 경호원 시크교도 2명에게 1984년 10월31일 암살당했다.
인디라 간디는 인도의 제3대 총리이자 독재자며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딸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의 딸로 본인도 독립운동을 하다 구속되는 등 고초도 겪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엔 자신에 반대하는 언론을 억압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비민주적인 통치를 펼쳐 반대파들에겐 독재자 소리도 들었다. 20세기 여성 정치인이 독립운동도 하고 총리도 하고 독재자 소리 듣다 중간에 쫓겨나기도 하고 다시 재집권도 하였으나 결국 암살당했다.

1917년 11월 19일에 알라하바드에서 출생했고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역사를 전공했으며, 대학 재학 중에 페로제 간디(1912~1960)와 만나 결혼했다. 이후 인도로 귀국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3개월 동안 구속되었으며, 인도가 독립하자 아버지인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보좌관이자 퍼스트 레이디 역할로 활동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1964년 인도 국민회의의 당 대표가 되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후 당내 치열한 권력 암투속에 최종 승리하여 총리에 올랐다. 1966년 총리가 된 후부턴 1977~80년을 제외하곤 1984년 죽을 때까지 쭉 장기 집권하게 된다. 다만 집권 이후 경기침체로 지지율이 떨어졌고 총리가 된 후 첫 선거인 1967년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개헌선을 훌쩍 넘겼던 1961년 총선에 비해 크게 의석수가 떨어진 283석에 그치는 사실상의 패배를 당한다. 이후 경제 사정이 다시금 상승세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4차 경제계획도 성장률 3.6%로 역시 목표치인 5.6%엔 많이 밑돌았다. 외교적으론 같은 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무력 개입으로 파키스탄을 패배시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원했다. 1974년에는 '미소짓는 부처' 프로젝트로 인도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하여튼 이런 와중에도 정권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으나, 1975년 6월 25일에는 부정선거 때문에 6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자 비상 사태를 선포해 강압적인 통치를 펼치게 된다. 특히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지역 정당들을 심하게 탄압하여 정치적 경쟁자들을 정치범으로 몰아세워 대거 구속, 독재자 소리도 듣게 된다. 허나 이후 인구 조절을 위하여 산아제한 정책을 무리하게 주도하다가 여론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1977년 3월 16일부터 1977년 3월 20일사이에 치러진 선거에서 패해 1977년 3월 24일에 하야한다. 하지만 새로 집권한 야당도 좌에서 우까지 스펙트럼 넓은 십수여개 정파들이 말 그대로 정권을 잡기 위해 서로 손을 잡았던 것 뿐이라 집권 후엔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1980년 1월 3일과 1980년 1월 6일에 걸쳐서 치러진 선거에서 어부지리격으로 1980년 1월 14일에 재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해 둘째아들인 산자이 간디(1946 ~ 1980)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기에 인간적으론 한동안 슬픔에 젖어야 했다.

1984년,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의 성지인 암리차르 황금사원에서 분리 독립을 원하는 시위를 하자, 6월 3~8일 탱크와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수백~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는 강경진압을 한다. 허나 이 진압은 시크교도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31일 평소 신뢰하던 시크교도 경호원인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의 총격으로 숨지고 만다.
베안트 싱은 다른 경호원들에게 사살당했고, 부상을 입은 사트완트 싱은 체포되어 수년뒤인 1989년에 교수형으로 사형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본인이 그렇게 극렬하게 시크교도들을 탄압하고도 경호원인 사트완드 싱과 베안트 싱은 그대로 두었는데 그것이 목숨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