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사살하였다.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4차례나 일제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는 데에도 크게 역할했는데 그가 만주를 방문하여 러시아와 회담을 갖는다는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것에 자원했다. 만주의 독립 운동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는 7인 동맹을 맺고 처단을 계획했다.
이날 안중근의 저격은 정확했다. 이토는 세발의 총탄을 맞았다. 피격 직후 기차 안으로 옮겨진 이토는 9시 30분 절명했다. 거사 직후 ‘꼬레아우라’ 즉 한국만세를 외친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 한사람에 대한 저격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부당성을 전(全)세계에 폭로하는 것이었다. 이토가 맞은 총탄 3발 중 한 발은 팔을 뚫고 가슴에 박혔고 나머지 두 발은 가슴과 복두를 관통했다. 나머지 3발은 이토의 수행원 3명에게 명중했다.
개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의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Vladimir Kokovtsov)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을 했다.
이토가 오전 9시 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약 25분 정도 코콥초프와 대화한 후, 그의 권유에 따라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총알을 발사하여 이토를 명중시켰다.
그 중 두발은 복부에 맞았다. 안중근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3발로 주위의 수행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하얼빈 주제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川上俊彦), 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를 쏘았으며, 안중근을 죽이려들며 해를 끼치자 일본군 장교 1명을 사살했다.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쓰러진 이토를 부축했으며 이토는 그의 품에 쓰러졌다. 수행원인 무로다(室田義文), 나카무라(中村是公) 등도 다급하게 이토를 껴안아 보호했다. 이때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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