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재학생으로 전두환 정권 당시, 반독재투쟁에 가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6월 9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기로 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요절하였다. 그의 죽음은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은 오후 4시 40분경 도서관학과 2학년생 이종창 등과 최루탄을 공격적으로 쏴대는 전투경찰들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일부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수평으로 직사하였고, 이것이 이한열의 뒷머리에 맞아 그의 얼굴에서 피가 번졌고, 코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이 최루탄은 수류탄처럼 던지는 형태가 아니라 척탄통과 비슷한 발사형이다. 원래 30도 이상 위로 들어서 발사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안전 장치가 있어 그러지 않으면 발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훗날 경찰이 누가 이한열의 뒷머리에 최루탄을 쏘았는지 수사를 진행했으나, 거의 모든 진압 경찰들이 최루탄을 위로 발사했다고 주장하면서 별 단서나 범인을 못 잡고 성과없이 수사를 종결하였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을 발견한 이종창은, 이한열을 끌어안고 학교로 들어갔다. 이종창은 이한열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며,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을 부축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이한열은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중얼거렸고, 뛰어온 학생들이 그를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오후 5시 30분에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 때 이한열의 왼쪽 뇌 전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뇌손상이 심해 회복하지 못했고, 신체 저항력이 급격히 떨어져 합병증세인 폐렴이 생기면서 결국 사망했다.
장례식은 1987년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직할시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는데,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결국 6.10 민주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이 이루어짐으로써 그의 바람이었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으나, 안타깝게도 이한열 본인은 이를 자신의 눈으로 보지도 못한 채 결국 25일 만인 1987년 7월 5일 오전 2시 5분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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