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5·3 인천사태

nyd만물유심조 2022. 5. 1. 20:35






5·3 인천사태(5.3 인천민중항쟁)는 1986년 5월 3일 대한민국의 재야 및 학생 운동권 세력이 국민헌법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민주화 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오랜 군사 독재정권을 끝내고 87년 민주항쟁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룩한 대한민국에서 잊히고 있는 사건이 바로 '인천 5.3사태'로 불리는 '인천 5.3항쟁'이다.
1986년 5월 3일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벌인 '인천 5.3항쟁'은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다른 도시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가 민주 운동으로 평가받고, 후대들이 그 정신을 계승하는 반면, 30년 전 인천에서 일어난 이 반독재 투쟁은 여전히 '항쟁'이 아닌 '사태'로 불리고 있다.

- 항쟁 배경
1985년 총선 승리로 전두환 정권을 대신할 민주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높아가면서 총선 1주년인 1986년 2월 12일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명 서명운동(2.12 개헌서명운동)‘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지지를 넓혀나갔다. 개헌 주장의 요지는 대통령 직선제였다. 이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신민당에 일정한 화해 제스츄어를 취하면서 4월 30일 전두환-이민우 회담을 마련했다. 당시 양자 간의 협상이 비록 결렬되기는 했지만, 전두환은 개헌 논의 허용을 발표하고 이에 이민우는 과격 좌익 학생운동과의 결별 의사로 응대했다. 이에 반해 학생운동 세력·노동운동 세력·민통련 등 재야단체 등을 포함한 민주화운동 진영은 단기적으로나마 신민당의 타협성과 보수성을 비판하며 일정하게 정치적 분리선을 그으려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의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가 예정되었다. 1986년 5월 3일 신민당은 개헌 현판식을 개최키 위해 인천 시민회관에서 인천시지부까지 행진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 민통련,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 등의 사회단체와 학생, 시민들 3만 여명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타협적 보수 야당을 비판하면서, 미국과 군부독재에 반대하며 보수대연합 음모를 규탄하고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군사독재 물리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 건설”과 “삼민(민족·민주·민중)헌법 쟁취”등을 주장하며 투쟁을 전개하였다. 경찰은 73개 중대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이에 대항하여 시위는 고조되었다.
한편 시민회관 앞의 2천여 시민, 학생들은 시민회관에 입장하려는 신민당 이민우 총재, 김영삼 고문 등에게 “신민당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로막아 결국 신민당의 개헌추진대회는 무산되었다. 이날 대회장에 뿌려진 유인물은 총 50여 종으로, 재야 단체 10여 종, 인천지역 노동자단체 10여 종, 학생운동 단체 15종으로 집계되었다. 유인물의 내용은 신민당의 정권과의 야합성을 비판하는 보수대연합 규탄, 반미·반파쇼가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신민당을 기회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개헌투쟁의 주체에서 신민당은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운동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반미투쟁의 고리를 끊기 위해 5월 7일 슐츠 미국무장관을 급파하고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회동하여 직선제 개헌요구를 포기하고 내각제로의 합의개헌을 종용하여 전두환 정권과 타협하는 보수대연합 구도를 실현시키려 했다. 그리고 정부는 공안기관을 총동원하여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에 대한 총체적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공안 당국은 인천 5·3항쟁을 좌경 용공 세력의 반정부 폭력 행위로 규정하고, 사회운동 진영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수배 및 검거에 돌입했다. 
5·3인천항쟁과 관련하여 총 319명이 연행되어 5월 5일 배후 주동 혐의로 장기표(민통련 전 사무차장), 이호웅(인사연 의장) 등 129명이 구속되었으며, 민통련 산하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한국노협 인천지역협의회 등 4개 단체의 간부 10명을 비롯 총 60명이 수배를 당하였으며, 6월 6일과 7일엔 수배자 수사과정에서 권인숙에 대한 성고문(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자행되기도 했다.

- 경과.
민통련은 인천에서 배포할 유인물 등을 미리 제작한 뒤 봉고차에 싣고 5월 2일 밤 서울을 출발, 주안5동성당을 거쳐 주안1동성당에 머물고 있었다. 5월 3일 아침이 되자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을 비롯한 민통련 소속 회원들은 플래카드와 앰프 등을 준비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 인천지역노동자동맹, 서울노동운동연합 등의 단체들이 주안역 광장에서 인천시민회관 방향으로 행진을 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인천시민회관 주변에서도 인하대 등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은 주안1동성당 앞에서 플래카드를 펴 들었다. 신기촌 쪽에서는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민민학련)과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등이 집결하고 있었다. 각 방향에서 행렬을 이룬 시위대는 인천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서 만났다. 그 사이 군중은 4천여 명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현장에 뿌려진 유인물은 ‘압제와 착취’에 언제까지 시달려야 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경, 시민회관 앞에서 ‘민주화촉진 인천시민대회’가 어수선한 가운데 개최되며 연설과 구호가 이어졌다. 마침 주안역 쪽에서 행진을 해온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 등은 시위 군중에 막혀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지구당 사무실로 이동했다. 신민당이 추진하려던 결성대회는 결국 무산됐다. 이 무렵 신기촌 방향을 향해 있던 민민학련과 민민투가 민주정의당 지구당사를 공격하고 길가에 있던 신민당 소유의 승용차를 불태웠다.
2시 30분경, 시위대는 버스정류소 시설 등을 넘어뜨려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성조기를 불태우고 경찰 가스차 1대의 무장을 해제시키기도 했다. 4시 30분경, 경찰 트럭을 빼앗아 방어선을 구축하자 경찰은 1시간 가량이 지난 후 진압을 시작했다. 경찰에 밀려 사람들은 석바위와 주안역 등지로 흩어졌고 일부는 철로를 따라 제물포역으로 이동해 시위를 계속했다. 오후 8시를 조금 지나 도화초등학교 앞까지 밀린 일부 시위대에 의해 경찰 봉고 차량 1대가 전소되는 것을 끝으로 항쟁이 마무리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