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는 1871년 6월 1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사이에 군사적 충돌로서, 조선측에서는 이를 신미양요라 하여 신미년 조선과 서양 즉, 미국사이에 발생한 전쟁 또는 소동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반면 미국은 이 사건을 1871년 한국 원정(Korean Campaign 1871) 또는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이라고 부른다.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민간인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 휘하의 관민이 합심해서 배에 불을 질러 격침시킨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미국 정부가 자국민을 참살한 것에 대한 항의와 제국주의 시절 횡행하던 강제 개항을 시킬 의도로 1871년에 미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 바로 신미양요이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는 1871년 5월 16일 프리깃함인 기함 USS 콜로라도를 비롯한 알래스카호, 팔로스호, 모노캐시호, 베니치아호 등 전함 5척을 이끌고 일본의 나가사키를 출발하였다. 병력은 500여 명의 수병과 150여명의 해병이 투입되었다.
미군 함대는 아산만 풍도 앞에 정박하고 작은 배에 병력을 나누어 강화도 인근을 정탐하였다. 5월 26일 영종도 방어사는 이양선이 나타나 물 깊이를 재었다고 보고하였고, 남양부사 신철구가 종선 세척에 탄 미군에 다가가 글로 목적을 물었으나 미군이 영어로 글을 적어 서로 의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미군은 큰 배를 가리키며 같이 가자 하였으나 함께 가지는 않았고 서로간에 약간의 물자만 교환하였다. 이튿날 미군 함대는 남양부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의 흠치대신이 귀국의 높은 대신과 협상할 일이 있어 온 것인 즉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다”고 목적을 밝혔다.
조선의 조정은 누차에 걸쳐 미국 군함이 올 것을 예고 받았기 때문에 답변을 보내지 않고 교전을 준비하였다. 미국 군함이 영종도에 이르자 사람을 보내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미군은 직급이 낮다는 것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6월 1일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은 강화도에 군사와 군량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행호군(行護軍) 어재연을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하여 방어토록 하였다. 이 날 미국 함대중 두척이 손돌목을 지나자 조선군이 대포로 포격하였다. 미국 군함은 응사하며 빠르게 빠져나갔다. 미군은 손돌목의 포격을 빌미로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6월 2일 광성진 앞 염하에 집결한 미군 함대가 포격을 개시하였다. 포격을 마친 함대는 남하하여 손돌목을 지날 때 또 다시 포격을 가하였다. 조선도 응사하여 미국 함선 일부가 파손되었다. 그러나, 미국 함대의 피해는 경미하였다.
몇 차례의 포격전이 있은 후 상호 교섭을 시작하였다. 미국 측 로우 공사가 해변에 편지를 쓴 장대를 꽂아두면 조선 측이 이를 읽은 후 답신하였다. 미국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였고, 진무사(鎭撫使) 정기원은 미국의 손돌목 침입이 불법이며 조선은 다른 나라와 교섭하지 않으니 즉시 물러가라 답신하였다. 미군은 물치도로 물러가며 2-3일 안에 답신이 없을 경우 공격할 것이란 최후 통첩을 남겼다.
6월 10일 미군은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군함 2척의 지원을 받으며 24척의 종선에 나누어 탄 651명의 병력이 상륙하였고 초지진을 수비하던 조선군이 백병전을 벌이며 저항하였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6월 11일 미군은 대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화력 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남기고 덕포진으로 패퇴하였다.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미군 기함 콜로라도호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미군이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지자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광성보 전투에서 보복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8시간 가량 치러진 이 전투에서 조선측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미군은 광성진의 관아를 불태우고 초지진을 거점으로 삼아 주둔하였다. 한편, 고종 실록은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군 전력
• 군함: - USS Colorado (1856년 건조 / 3425톤 / 10인치 포 2문, 9인치 포 28문, 8인치포 14문)
- USS Alaska(1868년 건조 / 2,394톤 / 11인치 활강포 1문, 60파운드 포 1문, 20파운드 포 2문)
- USS Palos(1865년 건조 / 420톤 / 포 2문)
- USS Monocacy(1864년 건조 / 1,370톤 / 13인치 구포 1문, 32파운드 포 2문)
- USS Benicia(1868년 건조 / 2,400톤 / 11인치 활강포 1문, 9인치 활강포 10문, 60파운드 강선포 1문, 20파운드 후장식 강선포 1문)
• 병력: - 해군 및 해병대 1,230명(스프링필드 모델 1861 전장식 라이플 + 미니에 탄으로 무장, 12파운드 곡사포 85문.
**조선군 지상 병력:
- 500여 명. 주 무장은 화승총
**양측 피해
미군: 전사 3명, 부상 12명.
조선군: (미군측 집계) 전사 243명, 익사 100여 명, 포로 20명 (조선측 집계 고종실록) 전사 53명, 부상 24명 초지진, 덕진진 및 광성보 시설 함락 및 조직적인 파괴와 요새 중장비 전량 노획 및 파괴, 수자기 약탈
신미양요 이후.
전투 이후 대원군은 지지 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덤으로 기세를 몰아 서원 철폐도 단행했다.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 척사파는 위정 척사파대로 흥선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한다.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신미양요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던 강화도의 수비진은 포함 한 척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렸고, 결국 조선은 개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운요호는 배수량 249톤밖에 되지 않았고 승조원도 수십 명에 불과한 작은 배였는데도, 이미 커다란 피해를 당한 조선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은행 발족및 업무개시일 (0) | 2022.06.11 |
---|---|
이한열 학생, 최루탄에 쓰러지다 (0) | 2022.06.08 |
5·3 인천사태 (0) | 2022.05.01 |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재선 성공 (0) | 2022.04.27 |
4·19 혁명(四一九革命) (0) | 2022.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