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망명 중이던 한국의 정치인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도의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0호실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5일 만인 8월 13일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몰락하였고 과도기 권한대행 체제를 거치며 출발한 제2공화국은 5·16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11개월 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이후 1963년 10월, 박정희는 출마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대선에 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후 연임에 성공한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하자 전국적으로 개헌반대 시위가 들끓었다. 야당 역시 극렬히 반대했으며 여당 내에서 조차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을 이용하여 당내 반대파인 김종필 지지세력을 제거하는등 여러 편법을 동원하며 반대세력을 무마시켰다. 또한 1969년 9월 14일 새벽에 개헌안을 기습 날치기로 통과시켜 3선을 위한 대선 출마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당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은 정책 대결을 이끌며 선전하였으나 1971년 4월 27일에 치뤄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94만표 차이로 석패하였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에 맞서 선전했던 김대중은 1972년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하였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1973년 7월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대중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던 박정희 정권 측에서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음은 당연지사였다. 대한민국 중앙정보부는 당초엔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 여사를 통해 김대중의 국내 정치활동을 보장할테니 망명을 그만두고 귀국하도록 설득했지만 "내 손발을 묶어놓을 뻔한 거짓말 아니냐"며 당연히 거절했고, 결국 중정은 인력을 투입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김대중을 암살할 계획을 꾸몄다.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객실중 가장 위층인 22층 2212호에서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당수 양일동, 김대중의 조카뻘이자 국회의원 이던 김경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의 중의원인 키무라 토시오(木村俊夫)와의 약속장소로 향하던 김대중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괴한 5명에 의하여 납치당했다. 범행 현장에는 백두산 담배, 배낭, 휴지, 노끈, 마취제, 탄창 등의 유류품이 남아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엘레베이터 에서 마주친 일본인 남녀에게 김대중은 일본어로 "납치된다, 살려주시오" 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야쿠자의 싸움인 줄 알고 엮이기 싫다는 생각으로 외면해 버리면서 김대중은 그대로 차량에 태워져 실려갔다.
괴한들은 오사카 또는 고베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 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보트에 태워 30~40분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김대중을 인계했다.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 가 손발을 다시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kg의 바위를 매달고, 등에 판자를 대어 몸과 함께 묶었다. 이때 이들은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바다에 후카가 많던데", "솜이불을 씌워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공포에 질린 김대중은 속으로 "하느님 예수님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라며 기도했다고 한다.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하던 중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굉음을 느꼈으며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면서 뛰쳐 나갔고, 배와 비행기가 서로 쫓고 쫓기를 30분 이상 계속하였다. 훗날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 비행기가 미국 CIA의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무토 마사토시는 자기가 동북아 과장 시절 여러 자료를 찾아봤지만 일본 자위대 비행기나, 해상보안청 헬기가 출동한 기록을 못 봤다고 일본의 인터뷰에서 증언하였다. 용금호를 추격한 비행체가 일본 소속인지 미국 소속인지 아니면 다른 국가인지는 아직도 불명이다. 일본이 아니라는 주장과, 일본이 맞지만 이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기록을 말소했다는 주장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한다.
당시 미국 CIA는 김대중의 납치 소식을 즉시 파악하고, 납치된 김대중의 소재를 24시간 안에 파악하고자 별도의 액션을 취했다. 이 때 주한 미국 대사이던 필립 C 하비브는 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레그에게 "박정희는 김대중이 납치된 이후 24시간 동안은 미국의 눈치를 볼 것이니 그 안에 찾아내도록 하라"며 조언했고, 서울에 있었던 도널드 그레그 본인 역시 감청 요원으로부터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직접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결국 CIA 한국지부 요원들이 김대중의 소재를 찾아냈다. 이때 관련 정보를 소지한 요원이 직접 청와대로 찾아가자 박정희는 앞에선 '아이 돈 노'를 외친 다음 뒤로는 풀어주란 명령을 했다고 하는 루머가 있었으며, 거의 맞는 내용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직후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용금호로 어떤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받은 선원들은 갑자기 김대중의 복면을 벗기고 손을 풀어주며 마실 것도 제공했다. 김대중을 배에 태운 지 53시간 만의 일이었다. 이때 어떤 젊은 선원이 김대중에게 "당신은 왜 해외에서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다니는 것이오?"라고 물었고, 김대중이 "나는 박정희 정권을 반대한 것이지 국가를 반대한 적이 없소."라고 답하자, 그 선원이 "정부는 국가나 마찬가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 끝에 김대중을 더 이상 살해할 여지가 없어지자 김대중은 8월 11일 새벽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해 구급차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들었다. 잠이 깼을 때는 어느 2층 건물에 있었다. 다시 날이 어두워지자 차에 태워진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15분경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김대중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정이나 남산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그들의 소행임을 알아듣게끔 진술했다. 결국 이후락을 위시한 중정은 김대중의 입을 막기 위해 수사를 이유로 김대중의 사저에 기자 및 외부인 접촉을 차단했고, 일본에도 수사를 이유로 보낼 수 없다는 방침을 외무차관 윤석헌을 통해 보냈다. 이 조처는 두 달도 넘게 10월 26일까지 지속됐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청은 납치 현장에서 주일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의 신분으로 일본에 머물던 김동운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여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관련자 출두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에 의한 일본 주권의 침해라는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하였고 양국 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한 북한이 8월 28일 남북회담 중단을 발표하는 등 남북관계 진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건 발생 석 달 후인 11월 2일, 김종필 총리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을 담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일본 다나카 일본수상에게 전달하였고, 다나카 수상 역시 납치사건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답신을 전달하였다. 양국 정부 모두 김대중 납치사건을 둘러싼 진상을 은폐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일관계의 갈등 역시 봉합되었다. 그 이후 사건의 배후와 과정은 명확히 밝혀지지 못하다가, 2007년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 보고를 통해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시 아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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