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0대의 왕(재위 1494∼1506).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생모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등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秕政)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었다.
출생-사망 1476 ~ 1506, 재위기간 1494년 ~ 1506년
가족관계 왕비 폐비 신씨, 아버지 성종(成宗), 어머니 폐비 윤씨,
출생과 생모
1476년(성종 7) 11월 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씨이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成宗)의 첫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妃)로 책봉되었다. 이름은 이융(李㦕)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연(書筵)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 발생
즉위 이후 신승선(愼承善), 노사신(盧思愼) 등 대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으나, 선왕의 명복을 비는 불교식 행사인 수륙재(水陸齋) 시행과 외척의 등용을 두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즉위 1년 후 생모인 윤씨가 사망하게된 사건의 전말을 알게된 후 방치된 윤씨 능묘 천장(遷葬)두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대립하였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국왕(연산군)과 삼사 사이에 더욱 갈등과 대립속으로 치달았다. 재위 4년인 1498년 7월 김일손(金馹孫)이 작성한 사초(史草)의 내용이 세조를 비판하고 붕당을 만들어 국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조의제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문제삼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은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이미 죽은 김종직(金宗直)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많은 신진 사류(士類)와 삼사에 속한 대간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왕(연산군)과 갈등을 빚으며 왕권을 견제했던 삼사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연산군의 실정
이후 국왕(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심인 사냥과 사치를 즐겼고 국고의 사정은 나빠졌다. 1504년에는 손녀를 궁중으로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하였다는 죄목으로 경기도관찰사를 지내던 홍귀달이 숙청되었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문제로 번졌다.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윤씨가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또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실정(失政)은 극에 달하였다.
폐위되어 연산군으로 강등
급기야 1506(중종 1) 훈구파를 중심으로 연산군을 폐위하려는 정변이 계획되었고 이에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 ·중추부지사 박원종(朴元宗)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켰으며 연산군은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났다. 실록에는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폐위된지 두달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선조 이후 정치 세력들이 붕당(朋黨)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파 대립으로 인해 국력은 소진되었으며, 임진 ·병자 등의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하였다.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아마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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