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冬至)는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이며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옛 사람들은 동짓 날을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라고 하여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으며, 태양의 부활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 설로 대접하였다. 즉 음력 11월을 동지가 있는 달 즉, 동짓달이라 불렀고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또는 작은 설이라 하였다.
동지는 특이하게도 애동지, 중동지, 노동지를 음력을 사용 구분하였다. 애동지는 음력 11월 10일까지 드는 동지로 아기동지, 오동지라고도 부르며 윤달이 들어 있는 해인데 아기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팥죽대신 팥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中冬至는 음력 동짓달 중순(음력 11월11일 ~ 11월20일) 사이에 드는 동지이며, 老冬至는 음력 11월 21일 이후로 드는 동지를 뜻한다. 즉 애기동지에는 팥시루떡을 해먹고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어먹는다. 그리고 중동지는 떡이나 팥죽 중 하나를 해서 먹는다.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부른다. 동짓날 일기가 온화하면 이듬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많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여긴다. 또 동짓날이 추우면 해충이 적으며 호랑이가 많다는 믿음이 있었다. 동짓날 연못의 갈라진 얼음의 모습이 마치 쟁기로 밭을 갈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용갈이[龍耕]이라고 하며, 동지가 되면 동지하례(冬至賀禮)로 버선을 선물했는데 이를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고 한다. 또 종묘에 청어를 천신하는데 경사대부(卿士大夫)의 집에서도 이를 행하였다고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동지의 시식으로 팥죽을 들고 있는데, 팥으로 죽을 쑤고 찹쌀로 새알[鳥卵] 모양처럼 빚어 만든 떡을 죽 속에 넣어 먹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최근까지도 여전해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는 말처럼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으로 전하고 있다. 팥죽은 다 만들면 먼저 사당에 올려 동지고사(冬至告祀)를 지내고, 각 방과 장독, 헛간 같은 집안의 여러 곳에 놓아두었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는다.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의 뜻이고 집안 곳곳에 놓는 것은 축귀의 뜻이어서 이로써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낸다고 믿었다. 이것은 팥의 붉은색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붉은 팥은 옛날부터 벽사(辟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모든 잡귀를 쫓는 데 사용되었다.
동국세시기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에게 바보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 귀신이 되어 붉은 팥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서 그를 물리친다.”라고 적혀 있다.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주술 행위의 일종이다. 그러나 동짓날이라도 동지가 음력 11월 10일 안에 들면 애동지라 하여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해서 팥죽을 쑤지 않는다. 또 그 집안에 괴질로 죽은 사람이 있어도 팥죽을 쑤어먹지 않는다고 한다.
경기도에서는 사당에 팥죽으로 차례를 지낸 다음 방, 마루, 장광 등에 한 그릇씩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는다. 경상도에서는 동지에 팥죽을 쑤어 솔가지에 적셔 집안 대문을 비롯하여 담벼락이나 마당에도 뿌리며 마을 입구에 큰 고목에도 뿌려 잡귀들의 동네 침입을 막는다. 강원도에서는 팥죽의 새알심으로 찹쌀이나 수수쌀로 만든 ‘옹심’을 넣어 나이 수대로 먹는다. 일꾼들은 이날 팥죽 아홉 그릇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져야 한다고 한다. 날씨가 더워서 팥죽이 쉬면 이듬해 농사가 풍년이라고 여긴다. 충남 연기에서는 동짓날 동지불공(冬至佛供)을 드리러 절에 다녀오며, 집에서 팥죽을 쑤어먹는다고 한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다. 이것은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다. 팥죽은 동지에만 쑤어먹는 것이 아니고 이웃이 상을 당하였을 때 쑤어 부조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는 팥죽, 팥밥, 팥떡을 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궁중에서는 원단(元旦)과 동지를 가장 으뜸 되는 축일로 생각하여 동짓날 군신과 왕세자가 모여 잔치를 하는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다. 지방의 관원들은 임금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동국세시기에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친다. 나라에서는 이 책에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달력은 황장력(黃粧曆), 청장력(靑粧曆), 백장력(白粧曆)의 구분이 있고, 관원들은 이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단오에 부채를 주고받는 풍속과 아울러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였다.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표지가 파란 청장력을 선사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달력은 내용이나 효용도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