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 8월5일 조선 건국.
1392년 8월5일은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무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옥새를 받으며 조선왕조의 막을 연 날이다.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다. 그후 이성계는 창왕 ·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가 신돈의 사생아라고 사건을 조작하여 폐위하는 등 정권 · 군권 · 경제권을 행사하였고,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후 1392년 음력 7월 17일(양력 8월 5일)에는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회수, 이성계에게 주면서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왕조가 막을 올렸다. 1393년 음력 2월 15일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1394년에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 건국 초기 개요
고려 말기에는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이 계속되었는데 밖으로는 북으로부터 홍건적이 침입하고, 서남 해안 일대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 때 이성계는 무장으로서 남북으로부터 침략해 오는 외적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이 무렵, 명은 한때 원이 차지하였던 철령 이북의 땅을 돌려 줄 것을 고려에 요구하였으나 당시 고려에서는 최영 등이 이를 거절하고, 명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방까지 수복하고자 군사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요동 공격을 반대하던 이성계는 출정 도중에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 등 반대파를 몰아내고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권력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새로이 과전법을 공포하여 그들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어 신진 사대부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은 공식 명칭으로 대조선국(大朝鮮國) 또는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주로 대조선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
고려가 문벌 귀족사회,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음에 비해, 조선은 양반 관료 사회, 유교 사상이 정치 및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친 사회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조선’이란 곧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뜻이며, 단군에게서 민족의 독자성을 찾자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은 건국 후, 곧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이를 한성부라 하였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읍지로서의 자연 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고 교통이 좋아 고려 시대에도 남경이라 하여 크게 중요시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가 이 곳을 주목하여 도읍지로 정한 것은 나라가 크게 융성하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뜻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한양을 중심으로 정치적 발전과 사회⋅경제적 안정을 이룩하여 504년 여간 지속되었다.
-국호에 관하여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즉위 교서를 통해 '나라 이름은 이전대로 고려(高麗)라 한다'고 밝히고, 명나라를 정벌하려던 고려 왕조와는 다르게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제후국으로서 명나라에 새 나라의 개국과 태조의 즉위를 알리는 내용의 사절을 보낸다. 이때 명은 새 나라의 국호는 무엇으로 고쳤는지를 되묻는데, 이에 조선은 백관을 도당에 모아두고 국호를 논의해 고려라는 국호를 고집하는 대신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조선(朝鮮)' 중에 하나를 택하여 달라고 청하고, 명이 '조선'을 택하여 국호가 확정되었다. 조선이란 국호의 유래는 고조선에서 나왔으며 조선이라는 국호는 이후 4세기경에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진서(晋書)에서는 선비족 모용부의 군주인 모용외가 조선공(朝鮮公)이 되었고 이를 모용황(慕容皝)이 계승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모용외의 조상은 단석괴(檀石槐)인데 이 단석괴는 고구려의 고주몽처럼 햇빛에 의한 회임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세월이 다시 흘러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에서는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으로 일방적으로 책봉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무마하려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요동 일대 지역의 이름으로 조선이 계속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조선이 고조선에서 유래한 유구한 지명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명나라에 나라 이름 선정을 부탁한 점은 두고두고 한국인들에게 찜찜한 일이지만, 당시까지도 고려 사직에 충성했던 이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상태였고 명나라 정벌이라는 고려 왕조의 명을 어기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하게 되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영향력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으로서도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만큼 왕씨의 고려 대신 새로운 국호를 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조선이 내정한 '이름 후보' 중 하나를 명이 선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얻는 외교적 영향력까지 계산하지 않았겠냐는 해석이다. 고려가 명나라를 정벌하려던 사실을 알고 있던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제후국을 칭한 조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정치적으로 간섭을 받는 제후국 취급을 받은 적이 없으며 조선이 명나라나 청나라에 종속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조선 자체는 조선인이 지배를 했지 명나라와 청나라가 간섭을 할 수도 없었다. 겉으로는 제후국을 칭했지만 내부에서는 묘호를 사용하는, 외왕내제와 비슷한 제도를 채택하였으며 당시 황제만 쓸 수 있던 묘호를 조선이 쓰는 것을 명나라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간섭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선은 이후 고종이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을 한후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여러 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국호로서의 조선은 막을 내렸고 다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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