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날이다. 이날은 2002 FIFA 한일공동월드컵 한국의 3/4위전날로 대한민국 대 터키와의 3위 결정전이 있었던 날이었다.
이날 연평도 근해 2척의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과 등산곶(육도) 388호정이 NLL을 1.1km 침범하였고 이에 해군 고속정 4척이 교전수칙대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참수리 편대는 각 편대별로 경비정 1척씩을 맡아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는데, 이 중 684를 맡은 232편대에서는 편대장 김찬 소령이 좌승했던 기함인 358호정이 선두를 맡고 357정은 300야드 정도 뒤에서 북한 경비정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윽고 참수리들이 차단 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684의 전진방향의 횡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684가 358을 지나친 순간 갑자기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358호정의 뒤를 따르던 357호정은 갑자기 정지한 684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었고 이로 인해 357의 좌현이 그대로 684에 노출되었다. 이때, 두 함정의 거리는 500야드로 북한 경비정의 조악한 수동 조작식 구형 육군용 대공포 및 신형 취급받던 T-34-85의 주포 ZIS-S-53 85mm 전차포로 철갑탄을 쏘더라도 초탄 명중이 가능한 거리였고 무엇보다 78식 저격보총의 사거리 내였다, 북한 경비정이 경고 사격없이 선수의 ZIS-S-53 85mm 전차포를 357호정에 사격함으로써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사격대응명령을 내린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은 초탄 명중 이후 4분 후인, 37mm 포탄이 함교에 명중해 아비규환이 된 찰나 저격수의 총탄에 등을 피격당해 몸을 떨다 전사하였다. 이후 이희완 부장이 의식이 없는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조타장 한상국 상사(당시 중사(진)) 역시 조타실 피격으로 전사, 기타 승조원들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이어진 사격으로 인해 엔진이 정지되고 전력 공급 기기가 파괴되어 357정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엔진이 정지하여 전력이 끊긴 상황에서 부장[ 이희완 중위(2019년 현재 중령)이 왼쪽 다리엔 고사총 탄두 관통상, 오른쪽 다리는 37mm 2연장 고사포탄에 부상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두지휘를 감행하였으며 20mm 시 발칸포가 전기 계통이 나간 상황에서도 비상 전력을 가동하고 공기 유압 펌프나 스위치 등으로 어떻게든 포를 조작하여 수동으로 발사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대응 사격을 한 지 12분 후, 20mm포 시 발칸 담당 병기부사관 황도현 중사(당시 하사)는 적의 집중 사격 속에서 헬멧을 쓴 두부에 37mm 포탄을 맞아 두부의 3분의 1이 포탄 탄두에 함몰되어 없어진 상태로 방아쇠를 잡고 안은 채 전사하였고, 조천형 중사(당시 하사)가 21포에서 응전하던 도중 등산곶 684호정 함교 뒷편 포좌의 ZPU-4 14.5mm 4연장 고사총과 포대 37mm 2연장 기관포 등의 집중 사격을 받던 도중 포탑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신 화상을 입고 질식사한 채 방아쇠를 잡고 안고 있었다, M60 기관총을 맡고 있던 내연부사관 서후원 중사(당시 하사)도 교전 중에 684에 승조한 저격수에게 왼쪽 흉부를 관통당하고 전사한다.
또한 갑판에서 소병기 사격을 담당하던 승조원들과 기관실, 통신실에 있던 승조원들 다수가 벽을 관통한 총포탄과 7호 발사관 등의 파편에 의해 부상을 입는다. 그 와중에 의무병 박동혁 수병(당시 상병)은 5군데나 총상과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조원들의 구호를 위해 분투하나 서후원 중사가 684호에 승조한 함상저격수에게 왼쪽 가슴 심장 부분에 7.62mm 총탄 한 발, 오른팔에 파편을 맞고 쓰러지자 분노하여 M60 기관총을 부여잡고 난사하다 적의 집중적인 소병기 사격에 재기 불능 상태가 되고, 이를 보다 못해 극까지 참은 분노가 터져 버린 권기형 상병은 자신의 왼손이 고사총과 파편에 부서져 왼쪽 손가락을 못 쓰는 상태로 서 중사가 전사한 거치대 앞에 뛰쳐나가 서후원 하사와 박동혁 상병이 쏘던 M60 기관총을 부여잡고 오직 오른손으로만 남은 잔탄을 그대로 등산곶 684호에 전탄 발사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병기장 황창규 중사가 사격을 마치고 나온 41포에 들어가 684호에 발사하려던 것을 황창규 중사가 그러다 죽는다며 함내로 끌고 들어갔다고 한다.
참수리 358정은 즉시 대응 사격을 하려 했지만 북한 경비정이 357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너무 가까운 거리라 사격 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서야 북한 경비정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은 358에서의 공격은 일체 무시하고 357정만을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358호정은 단 한 발도 피격되지 않고 사상자 및 함정 손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57호는 교전이후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을 포기, 침몰했으며 침몰 당시에는 탑승한 승무원 30명 중 4명이 전사, 1명이 실종되고 20명이 부상하였으나 이후 치료를 받던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이 국군수도병원에서 전사했으며 실종되었던 한상국 중사(당시 하사)가 침몰 41일째 날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 53일만인 8월 21일, 침몰된 배가 인양되고 수습되어 결과적으로 총 6명전사 19명 부상하였다.
한편 북한군의 피해는 약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보이며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는 반파된 채로 예인되어 퇴각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군 당국은 전군에 경계 강화령을 내리고 서산 상공에서 초계비행하던 KF-16 전투기 1개 편대를 NLL 인근 해상으로 긴급 파견해 확전에 대비했다. 청와대 또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는 등 비상태세에 들어갔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NSC에서 "북한 경비정이 선제 기습사격을 가하는 등 무력도발 행위를 자행한 것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는 행위로 묵과할 수 없다"며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군 당국이 더욱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춰 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6월 29일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ㆍ4위전 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으며,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30일 일본을 방문하는 일정도 다시 검토됐으나 일정 취소가 국민 불안감을 높이고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촉발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 그대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공동 개최국 대표로서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참석과 일본 총리와 갖는 정상회담을 위해 6월 30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다 (0) | 2021.07.07 |
---|---|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한국 지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 (0) | 2021.07.03 |
백범 김구 암살당한 날. (0) | 2021.06.25 |
워터게이트 사건이 드러나는 발단이 된 날(1972.6.17) (0) | 2021.06.16 |
제1연평해전(6.15) (0) | 2021.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