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부터 1970년 7월 7일까지 2년 5개월만에 완공되었다. 429억원이 투입되었으며 연인원 892만 8천명과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다. 77명이 건설과정에서 사망하였으며 16개의 업체와 3개 건설공병단이 참여하여 건설하였다. 1970년 당시 서울 - 부산간 고속버스 요금은 성인 1명 기준 1,600원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할 당시의 기점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이고 종점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이었으나, 2002년 5월 1일에 변경된 노선체계에 따라 기점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구서 인터체인지)이고 종점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으로 변경되었다.
사업은 1968년 2월 1일 서울과 오산을 잇는 제1공구를 시작으로 4월 3일 오산과 대전 간의 제2공구, 9월 11일 대구와 부산 간의 제4공구, 1968년 1월 13일 대전과 대구 간의 제3공구 순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68년 12월 제1공구가 준공되었고, 1969년 12월 제2·4공구, 마지막으로 1970년 7월 7일 제3공구까지 준공 및 개통되었다. 총연장 428km, 전체 2년 5개월간 공사비 총 429억 원과 연인원 약 900만 명 및 장비 165만 대를 투입한 결과였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함께 독일 순방길에 올랐다. 1967년부터 시작될 제2차 5개년계획의 준비를 서둘러야 할 시기여서 독일에 가서 경제건설의 방법을 직접 보고 배워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첫날 공식 일정을 마친 뒤 이튿날 쾰른 시로 가 독일의 첫번째 고속도로인 본~쾰른 아우토반을 승용차로 달렸다. 이때 주행시속이 160㎞였다. 당시 박 대통령을 비롯해 동승했던 참모진들 모두 엄청난 속도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은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두 차례나 중간에 차를 멈추게 하고 2~3분동안 차에서 내려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시설 등을 유심히 쳐다봤다. 이때 경부고속도로 건설 결심을 굳힌 순간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에게 고속도로 건설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마침 현대건설은 태국에서 99.7㎞의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정주영 회장 자서전을 보면,
"공기를 앞당기자. 평생 부르짖은 첫번째 구호이자 전략이다. 나는 당시로는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는 800만달러어치, 1989대의 중장비를 투입했다. 1965년 말 민간업체가 보유한 총 장비 수가 1647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해외에서 사들인 중장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자서전)
개통일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배우 신성일은 속도광이었는데,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날, 속도를 맘껏 즐겨볼 요량으로 머스탱을 끌고 개통 즉시 시속 200km로 부산을 향해 질주했다고 한다. 그때 부산에서 개통 테이프를 끊고 서울로 올라오던 대통령 일행 차량이 있었는데, 신성일이 추풍령 지나 19분쯤 지났을 무렵 대통령 일행을 지나쳤다고 한다. 나중에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당시 대통령이 "저 빨간차 몰고 휙 지나가는 놈 당장 잡아와라"라고 불호령이 떨어져 신성일은 큰일이 났지만, 당시 신성일이 유명 배우라 간신히 용서를 받고 넘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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