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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伽倻史)

nyd만물유심조 2017. 6. 4. 16:02

 

 

 

 

 

가야는 백제, 신라와 함께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어 기원후 562년에 신라 장군 이사부에 의해서 대가야가 멸망할 때까지 약 5,600년간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가야는 한반도 낙동강 유역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을 우리는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고,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가야가 무슨 이유에선지 백제와 신라에 가리어 빛을 바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야는 삼국 못지 않은 높은 문화수준과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맹체제에서 강력한 통치체제를 갖춘 고대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함으로써 한국 고대사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근래에 이르러 가야 지역에서 유적 발굴 증가와 《삼국사기》상대기사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 및《일본서기》에서의 수위 「임라일본부」설에 관한 비판이 일면서 가야사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이렇듯 최근에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신비의 고도왕국' 가야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멸망의 요인을 알아본다.

 

1. 가야소국과 연맹

가야는 기원 전후한 무렵, 한반도 남부의 낙동강 유역에 흩어져 있던 수국들로부터 출발하였다. 「삼국지」동이전은 3세기 무렵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당시 한반도 남부지방 마한, 진한, 변한에는 각각 54개·12개·12개의 소국들이 있었다고 한다. 가야는 이 삼한 중 변한지역에서 성립하였는데, 주로 낙동강 서쪽의 영남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 소국은 주변에 있는 다른 소국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독립적인 정치체였다. 그러나 철기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소국내부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철기보급의 증가, 군사력의 발달은 소국들 사이의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세력이 강해진 소국이 주변의 약한 소국을 제압하면서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세력이 강한 소국도 아직 주변소국들을 완전히 흡수하여 직접 지배할 힘을 갖지 못했다. 때문에 주변의 약한 소국들과 연맹관계를 맺어 상호공동의 원칙 하에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변한지역에서는 이들 소국들이 결집된 연맹체 전체가 '가야'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 그 연맹 체제에 속한 소국들도 각각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소가야(고성), 성산가야(성주), 비화가야(창녕)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가야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하였는데, 여기에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접도국(接塗國)·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순시국(古淳是國)·반로국(半路國)·악노국(樂奴國)·군미국(軍彌國)·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감로국(甘路國)·구야국(狗邪國)·주조마국(走漕馬國)·안야국(安邪國)·독로국(瀆盧國)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지》가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한 것이므로 이 시기까지 가야란 명칭은 쓰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고령가야(高寧伽耶:함창)·대가야(大伽耶:고령)·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소가야(小伽耶:고성)·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며, 《일본서기》에도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탁순(卓淳)·탁기탄(喙己呑) 등이 나온다. 특히 《삼국유사》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2. 前期 伽倻 聯盟

《삼국사기》〈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하늘에서 황금알 여섯 개가 내려 왔는데, 그 중 맨 먼저 수로왕이 나와서 가락국의 왕이 되고 이어서 다른 다섯 개의 알에서도 사람이 나와 각기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가야왕들 가운데 수로왕이 첫째였다고 하는 것을 보아, 초기에는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연맹체의 주도국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관가야가 있었던 김해지역은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있었다. 「삼국지」동이전에는 왜를 비롯한 이웃 나라들이 여기서 철을 많이 사갔다는 기록이 있다. 철은 무기나 농기구의 재료였으므로 사회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자원이었다. 또한 이 당시에 철은 무역을 하거나 물건을 매매할 때 화폐 처럼 이용되기도 했다. 김해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경상도 하류에 위치하여 해상과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따라 경상도 내륙지방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고, 바다를 통해 중국 군현이나 왜와 무역할 수 있는 요충 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금관가야는 이 같은 자원조건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일찍부터 중국 군현과 교류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철과 함께 이 선진문물을 다시 내륙의 열러 가야 소국에게 전해 주었다. 이러한 중계무역을 통해 많은 경제력을 지닐 수 있었던 금관가야는 소국들의 대외교역을 통제하면서 가야 연맹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든든히 구축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반에 신라가 급속히 성장하여 낙동강 방면으로 세력을 뻗치자 남해안의 가야소국들이 연맹에서 이탈하였고, 낙동강 동쪽의 여러 나라들도 신라에 항복하는 사태가 벌여졌다. 그 결과 금관가야가 강력한 집권체제는 갖추기도 전에 전기가야연맹은 와해되고 말았다.

 

3. 後期 伽倻 聯盟

전기가야 연맹의 해체후 가야세력은 연맹체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존재하다가 5세기 후반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다. 고령지역은 경상도 내륙지방 이였기 때문에 고구려 침입 때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할수 있었다. 대가야는 점차 경남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가야국가들을 포괄하면서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가야연맹을 결성하는데, 이것을 금관가야가 주도한 가야연맹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기 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후기 가야 연맹의 맹국이 대가야는 중국 남조의 제 나라와 교류하여 작호를 제수 받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한 악사 우륵으로 하여금 각 지역의 음악을 종합하여 새로이 가야금 12곡을 정리토록 함으로써, 각 소국간의 문화적 이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와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가야의 행동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554년 가야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창녕 지역까지 진출하여 행정관서를 설치하고, 대가야를 코앞에서 위협하였다. 결국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한데 이어 대가야도 562년에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끄는 군대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나머지 가야국가들도 차례로 신라에 병합되면서 가야 연맹은 소멸하였다.

 

4. 가야 멸망의 요인

가야 연맹은 낙동강 유역의 풍부한 농업생산력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낙동강 유역 곳곳에 부강한 읍락국가를 형성하여 발전해 왔다. 그런데 이들 가야연맹은 3∼4세기 백제와 신라가 각각 마한과 진한 지역에서 영도세력으로 등장하여 여러 제국들을 정복하고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것과는 달리 여전히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치 못하고 분립되어 있었다. 고대국가의 형성은 어느 강력한 부족이나 국가의 무력에 의한 정복이 기인한다. 그러나 가야 연맹은 오늘날 남아있는 고분유적에 비추어 보았을때 각 세력이 거의 백중지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력의 균형된 소국관계에 있어서는, 어느 한 나라에 의한 정복활동이란 어려운 것이다. 또한 가야제국은 대게 지리적 조건에 따라 분지에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지리적 조건도 각 소국간의 통합을 저해하는 한 요소였다. 이에 비해서 백제나 신라는 지리적의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어서 고대국가의 성립에 유리하였다. 이렇듯 고구려, 백제, 신라는 소국연맹 단계를 벗어나 넓은 영토를 직접 다스리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가야는 연맹체의 주도 세력만 바뀌었을 뿐, 멸망할 때까지 연맹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가야 멸망의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 신라와 함께 동시대에 건국되어 6세기 까지 독자적인 문화적 저력과 주체적인 역사적 발전 속에서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강력한 국가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가야는 삼국과 같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구분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즉 가야연맹체에 속해 있던 소국들은 각기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국가가 발전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연맹형태를 극복하지 못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이룩한 삼국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동욱 저 인용)

*참고 문헌*

윤석효. 『가야사』. 민족 문화사. 1991

한국 역사 연구회. 『한국 고대사 산책』역사 비평사. 1996

윤내현.『한국 고대사』.삼광 출판사. 1991

한국 민중 연구사 편저.『한국 민중사』.풀빛.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