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최은희, 신상옥 납북

nyd만물유심조 2022. 1. 13. 21:40

최은희는 1978년 1월 14일 홍콩에서 북한의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남편 신상옥도 그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에 역시 납북되었다. 납북된 이후 약 8년 동안 이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 활동을 하면서 영화 17편을 제작했다. 그후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에 오스트리아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탈북에 성공했다. 탈북 이후에는 한동안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했다.

-납치 전말.
당시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후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직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 중이었다. 그 때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 사람들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최은희에게 합작 작품 및 지원을 의논하고 싶다며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한다. 신상옥 감독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후원 교섭을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최은희는 학교의 발전을 생각하며 홍콩으로 갔는데, 며칠 일정대로 움직이더니 마카오로 넘어갔다가 뜬금없이 중국 본토로 가는 배에 태우고 '우리는 지금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하더란다. 최은희는 울며불며 내려달라고 외쳤지만 결국 이들이 준비한 마취제에 의해 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배 안의 침대에서 깨어났는데 벽에 걸린 거대한 김일성 사진을 보고 다시 한 번 기절했다고… 신상옥 감독은 홍콩에서 실종된 최은희를 수소문하다가 자신의 지인과 친한 사이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까지 정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는데, '납북이 틀림없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지만 수십년을 같이 지내온 동반자가 사라졌다는 것으로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이유가 납북이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던 신상옥 감독도 납북되고 만다. 현지에서 신필림 홍콩지사를 운영하던 교포 이영생이 사실은 북한의 공작원이었던 것. 거기에 신상옥의 지인이자 신필림 홍콩지사장을 맡고 있던 김규화가 그들이 쥐어주는 돈에 넘어가서 거짓 일정을 만들어준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북에서의 생활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에 끌려왔지만 비교적 환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최은희의 경우 남포항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이 인사하러 직접 나와서 기다렸고 최은희를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최은희는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겨 악수를 했고 공식 사진도 남아 있다. 최은희는 주변에서 자꾸만 사진을 찍어대서 움찔움찔 놀라고 신경질적으로 찍지말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 감독의 경우에는 납치된 이후에 처음엔 배후를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여 박정희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자신을 납치한 것이 북측의 공작원들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죽일 속셈은 아닐거라 여기고 여유있는 모습을 취하며 배 안에서 영화를 보는 등 공작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누렸다. 북한에 끌려온 다음엔 벤츠 승용차를 탈취해서 청천강까지 달려간 후 정주 즈음에서 기차로 갈아타서 중국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석탄간 위에서 꼬박 잠드는 바람에 기관사에게 들켜 끝내 잡히고 수용소에서 상당한 고생을 했으며 이후 탈출을 여러번 시도했다.

김정일은 대외 선전용으로 영화 예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으나, 북한 내부의 인력들은 수많은 제약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분야로는 워낙 인재가 없었기에 두 부부를 일찍이 점찍어 놓고 납북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고, 유럽 쪽의 영화제에 여러 편의 작품들을 출품한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을 출품, 그 외에도 '춘향전', '불가사리' 등 여러 작품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제작했다.

-탈출과정
탈출과정을 보면 1986년 3월 13일에 영화 촬영과 관련하여 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빈을 방문하던 중 미국 대사관으로 기습 입장하는데 성공하여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한다. 즉 신상옥은 앞서 언급한 에노키 아키라에게 빈에 갈 것이라고 알렸으며 점심 약속을 핑계로 불러냈다. 그리고 북한 감시원들의 감시를 따돌린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에노키 기자가 탄 택시가 도착하자 같이 동승하여 숙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확인한 이들은 택시 기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방향을 바꿔 줄 것을 요구했고, 에노키 기자에게 자신들은 자진 월북한 게 아니라 납북당했으며, 자신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빈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뛰쳐나와 뒤도 안돌아 보고 미국 대사관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렇게 망명에 성공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거주하였다. 바로 한국으로 갔다간 워낙 북한과 지척이라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추격자나 스파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고도 한다. 그래서 영화처럼 탈출에 성공했으나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또 한국 정부(정확히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자신들을 북한의 영화발전에 기여하고 동조했다면서 추궁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 걱정들을 하여 미국으로 간 것이다. 북한은 영화 제작 비용으로 쥐어준 230만 달러를 횡령하기 위해서 부부가 배신했다고 날뛰었지만,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돈을 돌려 주자 말을 바꾸어 미국의 납치극이라고 날뛰었고 신상옥에게 없던 일로 할테니 돌아오라고 수차례 접촉하기도 했다고 한다.

-국내 분위기와 미국 생활
당시에는 신상옥, 최은희가 북한으로 밀입국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것은 박정희와 신상옥의 불화가 배경이었다. 시작은 신상옥이 겁도없이 전태일 청계피복 노동자 분신사건을 영화로 찍겠다라고 말하고 다닌 것이다. 당연히 분노한 박정희 정권은 신상옥의 영화 촬영을 방해했다. 여기에 화가 난 신상옥은 1975년 '장미와 들개'라는 자신의 영화에서 검열삭제 당한 오수미의 상반신 노출장면을 예고편에 집어넣는 반항을 했다. 이 사건으로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은 인가를 취소당했고, 신상옥이 여기에 행정소송을 냈다가 남산으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있었다. 결국 행정소송은 취하되었다. 최은희가 납북되는 계기인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경우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상옥이 이사장인 학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면 정치적 외압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라진 것이다. 납북보다 밀입국 설이 신빙성을 갖고 회자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체제경쟁, 보도통제 등의 명목으로 이들의 납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이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납북 6년 후인 1984년 4월 2일에 와서야 이 사실을 공개하였다.
미국의 CIA는 자국에 망명한 이들 부부의 목숨에 5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북한에 의해 걸려 있는 상황에 맞서 언제나 그들을 경호해 주었으며, LA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집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들 부부가 미국 CIA에 중요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일상적인 대화를 녹음해 왔는데, 그야말로 희귀한 육성 테이프를 미국 정보기관 CIA에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 정부는 이들 부부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한다. 그야말로 영화같은 이야기며 각본 없는 제대로 된 한 편의 시나리오라고 하겠다.
이들은 2000년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했으며 2006년에 신상옥 감독이 지병으로 인해 사망했고 2018년 최은희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