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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 독일 전총리 별세(향년 87세)

nyd만물유심조 2017. 6. 17. 08:08

 

 

 

독일 통일의 주역 콜 전 총리가 루드비히스하펜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6월17일 일간 빌트 등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콜은 2010년 담낭 수술을 받고 2012년 심장 수술을 받은 데 이어 2015년에는 장 수술과 고관절 치료를 받는 등 노환에 시달려왔다. 여러 차례 위독설이 나돌던 콜은 향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콜은 1982~1989년에는 서독 총리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뒤부터 1998년까지는 통일 독일의 총리로 16년간 재임했다.

 

1930년 4월3일 독일 라인란트팔츠주의 루트비히스하펜에서 공무원인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콜 총리는 히틀러의 나치 군대에 징집됐었지만 15살 때 독일이 패전하면서 실제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그는 늦게 태어난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 그의 형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보수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콜은 16세에 기독민주연합(CDU) 청소년당원이 되면서 일찍부터 정치에 발을 들였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고, 39세에 라인란트의 최연소 수석장관이 됐다. 3년 후에는 기독민주연합의 대표가 되면서 서독 정계의 핵으로 떠올랐다.

 

그 후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그의 뚝심이 가장 빛났던 때는 두 개로 갈라졌던 독일이 하나가 되던 순간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시민도 예상치 못한 속도로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30년 동안 동·서독을 가로막고 있던 콘크리트 벽이 무너질 당시 콜은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으로 동독 사람들이 넘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실례지만 지금 바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곧바로 귀국한 일화는 유명하다.

 

바르샤바를 떠나는 순간, 그는 독일을 갈라놓았던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들을 겨냥해 “독일인의 생존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통일이라는 열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곧바로 베를린으로 날아가 “우리는 한 민족(Wir sind ein Volk)”이라고 천명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치력을 보여준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 뒤 혼란 속에서도 20일 만에 ‘통일 독일을 위한 10개항’을 발표한 것이었다. 독일이 하나가 되는 것을 처음부터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통일된 독일이 다시 군사강국이 될까 두려워한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견제는 만만치 않았다. 콜은 외교 수완을 발휘, 독일 통일에 긍정적이었던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렇게 내놓은 것이 ‘10개항’이었다. 뒤에 콜은 “부시는 통일로 가는 길에서 우리의 최대 동맹이었다”고 회고했다.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첫째, 인도적 분야와 의료 분야의 즉각적인 지원조치.

둘째, 경제, 과학·기술, 문화, 환경 분야에서 동독과의 협력을 확대함.

셋째, 헌법 개정과 새로운 선거법 제정 등 동독의 정치와 경제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 조성으로 서독이 경제 원조와 협력을 확대함.

넷째, 동독 모델로 총리가 제의한 조약 공동체를 고려해 볼 용의가 있음. 경제, 교통, 환경, 과학기술, 보건 그리고 문화 분야의 협력을 위한 공동 위원회를 구성함.

다섯째, 독일 연방국 건설을 목표로 한 동서독간 국가 연합적 조직으로 발전시킴. 이를 위해 동독에서 민주적 정통성이 있는 정부가 구성되어야 함.

여섯째, 동서독 관계의 반전은 전 유럽의 통합 과정 즉 동·서관계에 맞도록 함.

일곱째, 유럽 경제 공동체는 전 유럽 발전의 핵심으로 동독도 포함되어야 함.

여덟째, 유럽 안보협력 회의는 전유럽의 핵심 조직으로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경제 협력 조정을 위한 공동기구와 전유럽의 환경 보호를 위한 기구를 설립함.

아홉째, 유럽의 분단과 독일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광범위한 군비 축소와 군비 통제를 실시함.

열째, 이러한 광범위한 정책은 유럽에 평화를 달성하고, 이를 토대로 독일 민족은 자유로운 자결권을 행사하여 통일을 이룩함. 통일 독일은 연방 정부의 변함없는 정치적 목표임.

 

그러나 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이었고, 때론 권위적이었고, 여러 지도자들과 트러블을 빚었다. 극우파 네오나치들이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과 터키계 이주자들의 집을 불태울 때에는 늑장대응을 해 우익 폭력을 방치한다는 비난을 들었다. 체코나 폴란드 같은 동쪽의 작은 나라들에게 독일의 정책을 강요해 반발을 산 적도 있다.

콜의 임기 내내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와는 유럽 통합을 놓고 의견 차이로 공방을 벌였다. 2005년 콜은 자서전에서 “1989년 12월 독일 통일을 지지한다는 성명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대처의 분노는 끓어올랐다”고 적기도 했다. “마거릿 대처가 화를 내며 ‘독일을 두 번이나 때려눕혔는데 이제 그들이 돌아왔다’고 말한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썼다. 대처뿐 아니라 독일 내에서도 정치적 반대파에게 독설을 퍼붓거나 성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순탄치만은 않은 인생을 살았다. 41년간 함께 했던 첫 부인 하넬로어는 200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8년 35살 연하의 마이케 리히터와 결혼했으나, 말년에는 마이케에게 사실상 감금당한 채로 지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넬로어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뒀으나 아들들 모두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