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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날이다. 안중근(安重根, 1879. 9. 2 ~ 1910. 3. 26) 義士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고,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안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안 의사는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 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9시30분에 암살하였으나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져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황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 사형을 선고 받고, 거사이유 저술 등에 심혈을 기울여.
안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안 의사 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안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자 나라를 위해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안중근 약력
1907 사립학교를 건립, 민족교육 실시,
1908 연해주에서 의진 결성, 의군중장으로 국내 진공,
1909 단지 동맹 결성, 의열 투쟁.
1909.10.26 이토 히로부미 처단,
1910. 3.26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저술 중 사형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