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독립신문 창간

nyd만물유심조 2022. 4. 5. 21:52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을 사용한 근대 민간신문, "독립신문"이 1896년(고종 33) 4월 7일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독립신문은 한자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순한글과 영문 두 가지로만 발행했다. 즉 한글만 알면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면서도, 외국인들까지도 읽을 수 있는 신문을 만든 것이다. 처음 발간된 "독립신문"은 가로 22㎝, 세로 33㎝의 크기로 모두 4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3면까지는 순한글로, 4면은 영문판이었으며, 화․ 목․ 토요일 주 3회 발간되었다. 그러던 것이 1897년 1월 1일을 기해 영문판은 "The Independent"로 독립하였다. "The Independent"도 4면 으로 구성되었다.

"독립신문" 창간 당시는 독립문(獨立門), 독립공원(獨立公園), 독립관(獨立館)의 건립운동이 일어나던 때로 독립신문은 국민계몽과 더불어 이에 적극 호응하며 이를 선전하고 건립비용의 모금 창구로서 기능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정부의 지원이 막대했던 만큼 초기 신문의 논조는 정부의 시책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정부와 독립신문의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될 수는 없었다. 특히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만큼 외세와 관련해서는 친러반일적인 색채를 보였다. 당시 러시아는 만주에 이어 조선으로 침략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강화하고 있었고, 이에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친러 성향의 정권을 비난하고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한편 러시아를 비롯해 열강의 침략정책을 비난하는 논설을 게재함은 물론 열강에게 이권을 양도하던 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벌인 서재필은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에게 눈엣가시가 되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의 공사관 및 정부 관료들은 그를 추방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1897년 12월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독립신문은 운영은 윤치호(尹致昊)가 담당하였다. 그는 일본, 중국, 미국을 두루 거치며 발달된 근대 문명과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한 인물로 1897년 후반 이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서재필의 도미 후 독립신문만이 아니라 독립협회의 회장직도 겸하였다. 특히 윤치호는 독립협회장으로서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자주국권 수호와 자유 민권의 확보를 통한 자강개혁을 요구하는 헌의 6조(獻議 六條)를 결의, 이를 정부에 요구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독립신문 역시 자주적 근대화 운동의 필요를 널리 알리며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신문 외적으로도 윤치호가 주필이던 시기인 1898년 7월 1일부터는 격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이 매일 발간되는 일간지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논설과 잡보에 제목을 달기 시작하는 등 편집의 개선이 이루어 졌다.

그렇지만 독립협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국민 참정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국왕 고종은 이에 불안을 느꼈다. 새롭게 구성된 보수파 내각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부정하고 공화제 설립을 기도한다고 독립협회를 모략하였다. 협회의 주요 인사들이 체포됨에 따라 1898년 말 독립협회는 사실상 해산되었다. 윤치호 역시 1899년 1월 7일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으로 서임되어 서울을 떠나게 되자 독립신문은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당분간 주필을 맡다가 1899년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버얼리(H. Emberley)가 이를 대신하였지만, 영문판 "The Independent"는 1898년 12월 29일자 이후부터 2면으로 축소되다가 한동안 휴간에 들어가는 등 활력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899년 7월 14일 정부는 독립신문사에 임대해 주었던 사옥의 반납을 요구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 4일에는 서재필에게 4,000원을 지급하여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인수하였다. 이로서 1896년(고종 33) 4월 7일 1호 이래 약 43개월 동안 발행된 독립신문은 한글판 776호, 영문판 442호를 발간하고 1899년 12월 4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당시 조선인에 의한 민간신문의 등장은 시대적 필요였다. 즉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며 언론마저도 외세에 의해 장악되어 침략의 한 축을 담당했다. 1890년대 개화운동의 결과 정부에 의한 근대 신문이 발간되어 국민계몽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므로 이제는 민간 차원에서 신문을 통한 국권 수호와 국민 계몽은 시대적 필연이었던 것이다.
독립신문의 발간에는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 개화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서광범(徐光範)과 5촌 당숙인 그는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을 접했을 뿐만 아니라 1년여의 일본 유학을 통해 신학문을 익히고 귀국했으나 이전 갑신정변에 가담, 역적의 처지가 되어 이후 10여 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10년 가까이 되던 1894년(고종 31) 서재필은 의대를 졸업, 의사로 활동하였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진행되며 갑신정변의 가담자들에 대한 사면조치가 연이어 이루어졌다. 서재필 역시 1895년(고종 32) 12월 사면되어 10여 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서재필은 귀국 직후인 1896년(고종 33) 1월 갑오개혁 당시 입법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中樞院)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 정치 참여보다는 신문을 통한 대중계몽에 뜻을 두었다. 서재필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은 갑신정변 실패가 준 교훈과 미국 망명생활에서의 경험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을 대중의 지지 결여로 보고, 개화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결국 대중적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을미사변 이후로는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고 있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대중의 지지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또 서재필이 망명생활을 하던 당시 미국은 신문의 발행부수와 지면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신문을 통한 사회봉사와 개혁 운동이 활기차게 벌어지던 때였는데, 이러한 미국 언론계의 분위기는 서재필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결국 독립신문의 발간으로 이어졌다.
서재필과 더불어 독립신문의 제작과 발간에 크게 기여한 했던 인물은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이었다. 주시경은 1896년 4월 회계 겸 교보(校補)의 일을 맡았다가 후에는 총무 및 교보원으로 1898년 9월까지 독립신문의 제작에 간여하였다. 교보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주필을 보조하는 조필(助筆)로서 직접 기사를 작성하는 등 신문사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직위로 추정되며, 실제로 국문과 관련된 독립신문의 논설은 주시경이 작성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