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全泰壹, 1948년 9월 28일 ~ 1970년 11월 13일)은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이다.
전태일은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자기 몸에 휘발유를 다 부은후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이 전신에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화상 응급처치도 없이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명동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방치하였다. 결국 1970년 11월 13일 당일 밤 10시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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