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조선 고종 3년, 미국 앤드루 존슨 대통령 2년) 양력 8월 21일 (음력 7월 12일) 평양 군민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응징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행패를 부렸는데, 이에 박규수의 지휘 하에 관민들의 저항으로 배는 소각되고, 선원들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이르렀고 평양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와 쌀과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제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이 다치고 구경하던 백성 7명이 죽었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양 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활과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그에게 중군을 풀어주었다.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물이 불어났던 대동강이 포격을 하고 중군을 잡아두던 실랑이를 벌이다가 다시 물이 빠져버리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양 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짚과 기름을 뿌린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다. 결국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인 토마스가 이 배에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 여행을 하며 성경책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했으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했던 인물이다. 셔먼호의 승무원 구성을 보면, 선주 프레스턴, 선장 페이지(Page), 항해사 윌슨(Wilson) 등 미국인 3명, 통역 담당 토머스, 화물 관리인 호가스(Hogarth) 등 영국인 2명, 그리고 기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19명으로 총 24명이었다.
이때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개화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잡아서 협상에 쓰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내놓으라고 하는 분노가 너무 엄청나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통역을 맡았던 토마스를 비롯해 청나라 선원 이팔용, 말레이시아 및 미국인 선원들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맞아죽는다.
애시당초 셔먼호가 정부 소속이거나 지시를 받았더라면, 아무런 외교적 군사적 대책도 없이 조선인들 상대로 행패를 부리고, 도주 경로 확보도 없이 무턱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몰살을 자초하는 짓을 하지 않았을 수도있다.
이 사건의 발생 년도는 1866년으로 미국은 남북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지 겨우 1년 뒤였다. 미국 본토에서는 남북전쟁의 참화를 수습하기도 벅찬 마당에 전임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해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후임자로 올라 상황을 수습하던 상태였다.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미 정부는 직접 탐문 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와추세트호, 그 다음해인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방문의 목적은 정보 수집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모두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다. 신미양요가 일어날 때까지 전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한편, 셰난도어호가 방문했을 때 조선 정부는 미국에 공식 회답을 보내 제너럴 셔먼 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 때 미국은 조선이 아니라 청나라에도 정보를 구함과 동시에 "님들 지방 정부가 이랬는데 혼좀 내주셈."이라는 컴플레인을 걸었다. 즉, 당시 조선은 미국에게 있어 청나라의 자치주 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셈. 하지만 청나라는 이에 대해 "조선은 독립국이며 우리 소관 아님."이란 통보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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