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의거
(1932.4.29 11:50)
윤봉길(1908. 06.21 ~ 1932. 12.19)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봉길의 호는 매헌(梅軒),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별명이 봉길(奉吉)이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홍커우 공원에는 상하이 침략 일본군 1만명, 상해 거주 일본인 1만명, 그밖에 각국사절, 각계 초청자 등 2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하고 나서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하고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11시 50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퍼지고 나서, 묵념을 올리는 그 틈을 노려 도시락 폭탄을 힘차게 던져 단상으로 정확하게 명중이 되었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폭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켰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되는 그 찰나에 일본 헌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면서 윤봉길을 덮쳐 제압하였다. 윤봉길은 제압을 당하면서도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잃어 절름발이가 되었다.
윤봉길은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상하이 파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우편선 '타이요마루'에 실려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를 거쳐 1932년 12월 19일 육군 작업장에서 향년 24세로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냈다'고 할 정도로 윤봉길을 극찬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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