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등으로 불린다. 4·13 호헌 조치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또 6월 항쟁이 일어난 6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의 장례 때 독립운동세력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박종철, 이한열
1986년 인천 5.3 운동과 10.28 건대항쟁 실패 이후 5공 정권의 엄혹한 민주화세력 탄압으로 민중들은 혹한 속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반전의 계기를 가져온 건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명 '탁억사건' 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더라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고 책상을 내리쳤더니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망언이다. 저 제목을 사용한 신문이 동아일보다.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그리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천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사전집회가 끝나고 교문 앞으로 이동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 연세대생 이한열의 후두부(뒤통수)에 직격한 것이다.
이한열은 쓰러졌고,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호송됐다.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참고로 이종창과 이한열은 서로 친구 사이이기는 커녕, 이 집회 이전까지는 서로의 이름도 전혀 몰랐던 남남이었다.
-결
중국의 사상가 노신(魯迅)은 그의 글 <고향>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땅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것이 곧 길이 되었다.
한 치의 풀어짐도 허용하지 않았던 80년대 민주화 도정도 노신이 말한 '희망'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이제 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걸어가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저절로 얻어진 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