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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인식

nyd만물유심조 2016. 8. 7. 15:26

 

 

조선시대에 성인식은 유교에서 인생의 통과의례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관혼상제(冠婚喪祭) 가운데 관에 해당된다. 남자는 열다섯살에서 스무살, 여자는 대개 열다섯살 무렵에 관례(여자의 경우는 계례라고 부른다)를 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이정도 나이가 되면 성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성인식의 가장 큰 특징은 엄숙함이다. 관례를 치를 때는 빈객(여자인 경우에는 어머니의 친한 친구)을 청하는데, 그는 주인 대신 모든 의식을 주관한다. 사흘 전에 미리 사당에 관례가 있음을 고하고, 당일에 빈객이 도착하면 식을 거행한다.

첫 단계는 머리를 빗어 상투를 틀어올리고 옷을 갈아입는 가례이다. 여자는 머리를 빗고 비녀를 꽂는다. 다음엔 술로써 예를 행하는 초례를 행하고, 마지막으로 성년이 된 사람에게 성인이 되었다는 표시로 빈객이 자(字)를 지어주는 자관의례를 행한다.

실제과정은 훨씬 복잡하지만 기본적인 절차는 이처럼 가례, 초례, 자관의례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 여자의 경우에도 빈객으로 초청된 부인이 자를 지어준다. 관례가 끝나면 관계자들은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성년이 되었음을 알린다. 이 모든 과정은 엄숙하게 치러졌고,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주위에서도 대접이 달라졌다. 우선 남자는 상투를 올리고 갓을 쓰며, 여자는 쪽을 지어 비녀를 꽂는 등 겉모습부터가 완연히 달라져 진짜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관례는 오늘날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의 풍습과는 달리 만 스무살이 되는 해 5월에 일률적으로 '성년의 날'이라는 것을 정해두고 있고, 그나마 특정한 성인식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조혼풍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아무튼 조혼이 일반화되다 보니 관례와 혼례가 겹치게 되었고, 이 때문에 혼례를 앞두거나 혼례를 예정하고 있는 집안에서는 별도의 관례를 치를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관례는 자연스럽게 혼례에 접목되었다가, 상투와 갓이 사라진 이후에는 관례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된 듯하다. (김경훈의 "뜻밖의 한국사" 에서 )

 

-실예로 본 철수의 관례 진행

철수의 관례는 어떤 절차로 진행되었나 가상해 본다.

관례를 치르기 사흘 전, 철수네 아버지는 사당에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올리고, 자신의 친구 중에 예법을 잘 아는 사람을 빈객(賓客·귀한 손님)으로 청해 집에 머물게 한다. 관례 날 하루 전, 대청마루의 동북쪽에 휘장을 쳐서 관례 장소를 마련한다. 철수 아버지가 평소에 사용하는 사랑방을 관례 치르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관례를 치르는 당일, 철수는 머리를 빗겨 올려 상투를 틀고, 모자와 옷을 각기 다른 것으로 세 번씩 갈아입는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예절을 배웠다. 그다음에 아버지 친구인 빈객이 철수에게 자(字·관례를 치르며 받는 어른 이름)로 '현명'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렇게 하면 관례의 절차가 거의 끝나는데, 철수 아버지는 관례를 받은 아들 철수를 데리고 사당에 가서 관례를 마쳤음을 고하고, 철수가 이웃 어른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올리게 한다. 또한 철수의 친구들을 초대해 '댕기풀이'라는 축하 잔치를 연다.

 

조선시대 양반 여자들의 성년례는 계례(笄禮)라고 불렀다. 여자아이가 땋았던 머리를 풀고 쪽을 찌어 비녀를 꽂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비녀는 한자로 계(笄·비녀 계)다. 15세가 되는 해의 정월(1월) 계례를 치른 여성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어른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평민 자녀들은 재미있는 형태로 나름의 성인식을 치렀다. '들돌'이라고 부르는 무거운 돌을 들어서 힘을 자랑하고, 마을 어른들에게 '진서턱'이라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신고식 겸 성년식을 치렀다. 이렇게 하면 그 뒤로 어른들과 동등한 노동력을 인정받아 같은 임금을 받고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