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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에는 홍랑(洪娘)이라는 조선시대 기생의 묘가 있다. 조선시대의 기생은 '관물(官物)' 취급을 받는 노비와 다름없는 천민신분이었다. 어인 연유로 천민인 관기 홍랑이 양반 가문의 선산에 묻혔는지, 그것도 최경창 부부 합장묘 아래에 묻혔는지, 그 애절한 사연을 알아본다.
洪娘은 조선 선조대의 기생으로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뛰어난 문학 작품을 남긴 기녀로 손꼽힌다. 홍랑의 경우 기생으로서의 정조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생몰년도는 미상이고 함경도 홍원현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 최경창과 홍랑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은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 과 손곡 이달(蓀谷 李達, 1539~1609)과 함께 당나라 이태백, 두보, 왕유에 비유되는 조선 중기 삼당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 시대 3당 시인 중 하나였던 고죽 최경창이 1573년(선조 6년) 북도평사로 발령받아 임지로 갈 때, 함경도 홍원현 현감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고 이 때 홍원현 관기(官妓) 홍랑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하지만 관기였던 신분 탓에 최경창을 따라가지 못했고, 그렇게 첫 만남은 짧게 끝나고 만다. 이때 홍랑은 몸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마음만이라도 함께하고 싶다며 시 한수를(한글로) 올렸다. 이것이 바로 후에 최경창이 묏버들가(歌)로 제목을 붙여준 시인 것이다.
묏버들/ 홍랑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난 窓(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서
밤 비예 새 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즉, 산버들을 가려서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이 나거든 나를 보는 듯이 여기소서
이 시조를 본 고죽 최영창은 한시로 번역하여 고죽유고(孤竹遺稿)에 ‘번방곡(飜方曲, 시조를 번역함)’으로 전하고 있다.
折楊柳寄與千里人(절양류기여천리인)
버들가지 꺾어 천리밖 임에게 주노니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나를 위해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誰知一夜新生葉(수지일야신생엽)
하루밤 사이 새 잎이 나거들랑
憔悴愁眉是妾身(초체수미시첩신)
초췌한 근심어린 눈섶이 바로 저인줄 아세요
2년 후인 1575년 최경창은 함경도에서 돌아와 큰 병을 얻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관기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길을 걸어 7일만에 서울에 도착해 최경창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덕분에 최경창은 쾌차했으나 사사로이 관기를 불러들였다는 죄로 탄핵을 피할 순 없었다. 이후 홍랑은 다시 함경도 홍원현으로 돌아갔고, 최경창은 그녀에게 작별선물로 "증별"이란 시 한 수를 건네주는데 이것이 이들의 살아생전 마지막이었다.
증별(贈別) :이별을 아쉬워하며
玉頰雙啼出鳳城(옥협상제출봉성):
고운 뺨에 눈물지며 한양을 나설 적에
曉鶯千囀爲離情(효앵천전위리정):
새벽 꾀꼬리가 이별의 슬픔 울어주네
羅衫寶馬汀關外(나삼보마정관외):
비단옷에 천리마로 나루 건너니
草色迢迢送獨行(초색초초송독행):
외로운 이별 길에 풀빛만이 아득하네.
증별2
相看脉脉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말 없이 마주보며 난초(幽蘭)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 하늘 끝으로 이제 가면 언제 돌아 오련마는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에서 옛 노래 더 이상 부르지 말아라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까지 구름과 비에 청산 자욱 끼었으니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가 선조 9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1583년 최경창이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홍랑은 시묘살이를 자처한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용모를 훼손해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고 오로지 시묘만 했는데,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3년 후에도 그 근방에서 묘를 지켰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시를 챙겨 고향으로 피난, 그 후 난이 가라앉자 되돌아왔다.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인 고죽의 시가 <고죽집>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이같은 홍랑의 열정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예를 갖춰 장사를 지냈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기생 홍랑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3번이나 헤어졌으나 마지막에는 연인 고죽의 곁에 머물게 된 것이다. 이건 정말 엄청난 건데, 그 고지식한 양반가에서 기생을 가문의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대우해 줬다는 거다. 더군다나 관에 속한 기생의 경우에는 원래 빼돌리는 것 자체도 불법이었다.
- 최경창과 홍랑의 묘
최경창과 홍랑의 묘는 원래 최씨 문중의 선산 4만평이 있는 경기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다. 그런데 이 선산은 1969년 미군 캠프에드워드가 주둔하면서 국방부에 의해 미군부대 부지로 강제로 보상 수용됐다. 이에 영태리의 선산을 징발 당한 최씨 문중은 당시 파주 교하면 다율리 519-7번지 야산을 구입해 종중묘를 이장했다. 그러나 2005년 파주 교하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종중 소유의 부지 1만평중 절반 가량이 수용됐다. 그리고 교하 다율리 최씨 문중 묘지는 2018년 GTX A노선의 기지창으로 결정되면서 다시 수용지역으로 편입됐다.
이에 종중에서는 문화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2022년 적성면 지역으로 이장을 결정, 추진했으나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강화되어 도로변이나 주거지역에 근접한 곳에 설치가 어렵게 되자 2023년 법원읍 동문리 295-9번지로 이전했다.
현재 부지는 전체 800㎥ (242평)으로 가운데 고죽 최경창 부부와 홍랑, 좌측에 최수인 부부, 최휘의 (諱凝)부부, 우측에 최휘집(諱潗) 부부의 묘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69년 6월 다율리에 세웠던 이장 묘역 조성비와 홍랑가비를 이전 설치했다. 묘역 조성비는 해주최씨 선조의 업적과 연혁을 비석 4면에 새겼다.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건립동호회"가 세운 홍랑가비는 전면에 묏버들 시와 함께 후면에는 고죽 최경창이 묏버들가를 한시로 번역한 문장을 새겼다.
https://youtu.be/cjpoRoLdPlo?si=bmTKRE1S26wBqmw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