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양절이란 날짜가 달의 숫자와 같은 중일(重日)을 기념하는 명절로 음력 9월 9일이다. 이외에도 중일은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등 홀수, 즉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이 여러개 있어 모두 중양이지만 이중 9월 9일만 중양 또는 중구(重九) 즉, 9(九)가 겹쳤다는 뜻으로 음양 철학적인 중일명절(重日名節)로 기렸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양(陽)의 수’라 하고, 짝수[隅數]를 ‘음(陰)의 수’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날, 삼짇날, 단오, 칠월 칠석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를 길수로 여기는, 즉 양의 수가 중첩된다는 기수민속(奇數民俗) 때문이다.
신라시대에는 군신들의 연례 모임이 행해졌으며, 안압지의 임해전(臨海殿)이나 월상루(月上樓)에서 군신이 중양에 연례적으로 모여서 시가를 즐겼다. 특히 고려 때는 임금이 참석하는 제사를 올리는등 국가적인 향연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이날 중구연(重九宴, 重陽宴)을 열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날은 국가가 규례를 정하여 내외 신하들과 송나라, 탐라(耽羅), 흑수(黑水)의 외객들까지 축하연에 초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에는 중삼, 즉 3월3일과 중구(9.9)를 명절로 공인하고 노인 대신들을 위한 잔치인 기로연(耆老宴)을 추석에서 중구로 옮기는 등 이 날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중양절에는 이와 같이 제사, 성묘, 등고, 또는 각종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관리들에게 하루 휴가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관리들이 자리에 없기도 하였지만 또한 명절이었으므로 이날은 형 집행을 금하는 금형(禁刑)의 날이기도 하였다.
중양절은 3월 삼짇날 날아온 제비가 다시 강남(江南)으로 가는 날이기도 하여, 이즈음에는 제비를 볼 수 없다. 이 날에는 화채(花菜)를 시식(時食)으로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화채는 유자를 잘게 썰어 석류 알, 잣과 함께 꿀물에 타서 마셨고 또 이때쯤이면 약초가 한고비를 이루는데, 구절초는 이때 가장 약효가 좋다고 하여 산이나 들에 나가 뜯기도 한다.
사가(私家)에서는 양(陽)이 가득한 날이라고 하여 수유(茱萸) 주머니를 차고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 모자를 떨어뜨리는 등고(登高)의 풍속이 있었고 국화를 감상하는 상국(賞菊), 장수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거나 혹은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범국(泛菊), 또는 황화범주(黃花泛酒),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시주(詩酒)의 행사를 친지나 모임을 통해 가졌다. 서울의 선비들은 교외로 나가서 풍국놀이를 했으며 이날 남산과 북악산에 올라가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다고도 하는데 이것도 등고(登高)하는 풍습을 따른 것이다.
간혹 추석 때 햇곡식으로 제사를 올리지 못한 집안에서는 뒤늦게 조상에 대한 천신을 한다. 떡을 하고 집안의 으뜸신인 성주신에게 밥을 올려 차례를 지내는 곳도 있다. 전라도 한 지역에서는 이때 시제(時祭)를 지내는데, 이를 ‘귈제’라고도 한다.
중양절의 시제는 조선 후기 이후 특히 영남 지방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모신 집안들을 중심으로 행해져 왔다. 유교 제례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4대가 지나면 사당에 모시던 신주를 묘에 묻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나라에서 부조(不祧), 즉 묘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있어야 사당에 신주를 두고 계속 기제사로 모실 수 있다. 이 부조가 인정된 조상에 대한 시제는 각별히 중일(重日)을 택하여 삼월 삼짇날이나 구월 중양절에 지내는데, 특히 중양 때가 되어야 햇곡을 마련할 수 있어 첫 수확물을 조상에게 드린다는 의미와 함께 지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지방에서는 중양절 행사로 기로회나 중양등고(重陽登高)라고 하여 산에 올라가 양기를 즐기는 일이 많았고 이에 따라 중양회(重陽會)라는 모임도 생겨났다.
그러나 우리 일반농어민사회에서는 어디까지나 추석, 백중(百中 : 7월 15일), 대보름(1월 15일) 등 보름명절이 훨씬 성대하였고 중구 때는 벼수확과, 목화따기 및 콩·팥·조·수수·깨·고구마·감자에 무·배추 등 김장채소 거두기까지도 겹치는 농번기였으므로 명절로 즐길 겨를이 없는 때였다. 최남선(崔南善)도 “중구는 어디까지든지 궁정(宮廷) 또는 선비들 같은 특수계급의 절일에 그친 것이었다.”고 못박고 있다. 중구가 단풍이 곱게 물들고, 등고와 상국에 알맞은 계절임은 분명하나 지금은 중양, 중구의 명절의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