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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발트3국은 이 조약 폐기와 완전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3국으로 수도를 연결하는 긴 도로에 600㎞에 달하는 ‘인간 띠’를 형성한 가운데 모두 200만여 명이 국가를 합창하는 모습을 보여 전 세계가 폭발적으로 환호하면서 지지를 보냈다. 결국 이들은 소련이 물러날 때까지 독립 쟁취의 노래를 계속했는데 이를 ‘노래 혁명’이라고 부른다.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1991년 8월 정변이 일어난 기회를 포착하여 결국 발트 3국은 희망을 노래하면서 평화적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며 소련은 1991년 9월6일 독립을 승인하였다.
- 발트3국의 역사, 동향
인구로 보면 모두 소국이다. 2021년 기준으로 에스토니아 132만 명, 라트비아 185만 명, 리투아니아 266만 명에 불과하다. 발트 3국은 대체로 비슷한 역사 과정을 거쳤다.
3국은 중세 이후 독일, 덴마크,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왔다. 13세기초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에 진출해 탈린(Tallinn)을 건설하고 일대를 장악했다. 이어 독일 주교단과 기사단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16세기 중반까지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엔 덴마크와 폴란드에 분할되었다가 다시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1710년 러시아 피오트르(Piotr) 대제가 발트해에 항구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지역을 합병한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 발트 3국은 독립을 하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1939년 독소 협정으로 다시 소련 땅이 되어 소련의 3개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소련의 지배 시절에 발트 사람들은 핀란드 TV를 시청하면서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인식하게 되고, 소련체제에 대한 저항감을 키웠다.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은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이라 한다. 발트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에스토니아에서는 유서깊은 노래 축제를 매년 열어왔다. 이 잔치에는 전국의 에스토니아인은 물론 이웃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참여하고, 해외동포들도 찾아와 1주일간 노래의 향연을 벌였다. 1869년 에스토니아 타르투(Tartu)에서 시작된 축제는 민속의상을 입고 민요와 합창곡을 부르며 국가 화합을 도모하는 행사로 진행되었다.
2차 대전 기간에 발트인은 독일에 점령되어 5,000명 이상이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독일과 소련의 전쟁터가 되어 산업의 45%, 철도의 40%가 파괴되고, 20만여 명이 희생되는 손실을 입었다.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에스토니아 탈린 주거지의 약 30% 이상이 파괴되었다.
이 슬픈 운명을 겪은 민족들은 노래로 상처를 달랬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노래 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소련의 탄압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들은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로 대응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운동을 격화시킨 사건은 1987년 2월 소련 정부가 인광석을 발굴하려는 계획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이 계획은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MRP-AEG그룹이라는 단체가 소련의 계획을 공개하고 비난했다.
이 무렵 알로 마티센(Alo Mattiisen)이라는 음악가는 다섯곡의 애국 노래를 작곡해 1988년 5월 타르투 민속음악제에 내놓았다. 그해 6월 탈린에서 열린 노래 축제가 끝난후 참가자들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독립 열기를 뿜어 냈다. 이 노래는 에스토니아는 물론 이웃 발트 국가에 퍼져나갔다.
1989년 8월 23일에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지나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 이르는 600㎞의 길에 약 200만 명이 거대한 인간띠를 형성했다. 발트 3국인들은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고, 자유의 열망을 외쳤다. 이는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록되었다.
[ 드디어 이날 약속한 저녁 7시, 사람들은 다함께 소리치기 시작했다.
"라이스베스! 브리비바! 바바두스! "
"라이스베스! 브리비바! 바바두스! "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라이스베스(laisves), 라트비아 사람들은 브리비바(briviba), 그리고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바바두스(vadabus)를 외치고 있었다.
외치는 언어는 서로 달랐지만 그 뜻은 똑같은 하나였다.
"자유! 자유! 자유! "
620Km 도로를 꽉 채운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다함께 노래를 불렀다.
독립의 노래, 자유의 노래를 ]
에스토니아 민중의 노래 부르기와 인간띠 잇기 운동에 힘입어 1991년 에스토니아 소비에트(의회)는 독립을 요구했다. 노래혁명은 다양한 시위와 저항운동으로 4년 동안 지속되었다.
1991년에 소련군 탱크가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에스토니아로 밀고 들어가려 할 때, 에스토니아 의회는 독립을 요구하며 소련 법률을 거부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소련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인간방패를 형성하며 방송국을 둘러쌌다. 소련 탱크는 더 이상 에스토니아를 진입하지 못했다.
1991년 8월 20일 저녁 늦은 시각, 에스토니아의 정당들은 협의를 거쳐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군은 TV 방송탑을 포격하려 했다. 소련에서 고르바쵸프를 실각시키려는 쿠데타가 발생했고, 쿠데타 세력이 에스토니아의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포격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소련의 쿠데타가 옐친의 민주회 사위로 인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에스토니아는 참화를 비껴나게 되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는 발트 3국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같은 해 5월 4일에는 라트비아, 5월 8일에는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은 1991년 9월 6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소련상황
1991년 8월 소련 보수파에 의한 8월 쿠데타가 일어나 고르바초프가 일시적으로 실각하면서 소련군과 독립운동 세력 간 긴장감도 일시적으로 높아졌으나, 쿠데타가 소련 내 각지의 거대한 반발에 직면하면서 보수파들은 결국 발트 3국의 독립을 막기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쿠데타는 3일만에 쿠데타 측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8월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고르바초프의 권력 또한 크게 약해졌다. 고르바초프를 지탱하던 소련 정부 주요 인사들이 8월 쿠데타에 대거 참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휘둘리는 처지가 되었다. 정부조직조차 통제를 못 하는 고르바초프가 발트 3국을 통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소련 정부는 쿠데타 직후 1991년 9월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던 옐친 역시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발트 3국은 1940년 나라를 잃은 지 약 반세기 만에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