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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적인 한일 강제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되고 29일 공포되었다.
국치 관련 용어부터 살펴보자. ‘합방’ ‘합병’은 두 체제가 평화적으로 합의하여 새 국가를 만든다는 뜻이므로 ‘한일합방’ ‘한일합병’은 부적합하다. 따라서 ‘강제병합’ 또는 무력에 의한 침탈의 ‘병탄’(倂呑)이라 써야 한다. 병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물건이나 국가를 강제로 빼앗아 합치는 것”을 뜻한다.
한일 강제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체결되었다. 그날 서울 거리 곳곳에 일본 헌병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은 이름대로라면 복을 일으키는 곳이다. 그 곳에서 조선 왕실의 숨통을 끊는, 비극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내각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형식적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에 참석했다. 창덕궁에는 순종황제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회의는 한 시간도 채 못되어 폐회했다. 토론은 없었다.
한일 강제병합조약안은 별다른 수정없이 8월 18일자로 한국정부의 내각회의를 통과하였고, 8월 22일에는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순종황제가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함으로써 같은 날 이완용과 테라우치통감 사이에 병탄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리고 8월 29일자로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공포되었다.
- 당시상황.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면서 일본 보호국이 됐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 해산을 당했고, 사법권과 감옥사무 등을 잃어버린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22일 결국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된 것이다.
일본제국의 병탄 방침은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됐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짜놓기 시작했다.
송병준은 1909년 여러 차례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매국흥정을 했다. 이완용은 국내에서 일본인과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처럼 송병준과 이완용이 국내외에서 매국흥정에 나선 것은 통감부가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송병준 내각을 구성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면서이다. 그러면서 이완용과 송병준은 충성경쟁을 한 것이다.
이완용은 송병준에게 내각을 빼앗기면 자신은 정치적 보복을 당할 것이 두려워 통감부에게 자신에게 매국흥정 주도권을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8월 22일 일본제국은 나남, 청진, 함흥, 대구 등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창덕궁 흥복헌에서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면서 쫓겨났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이 어전회의에 참석했다. 이들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했다.
이때 친일파들은 숭종황제에게 옥새를 찍으라고 강요했다. 그것을 엿들었던 순정효황후는 옥새를 가져다가 치맛자락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다.
비록 친일파 대신들이라고 해도 황후의 치마를 들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저했지만 윤택영의 형이면서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친일파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치마를 들춰서 옥새를 빼앗고 말았다.
순정효황후의 이런 행동은 결국 한일 병합 조약이 원천 무효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고 있다.
-한일 강제병합조약 원문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국 황제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대한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한제국 황제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대한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일본국 황제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함.
일본국 황제는 대한제국 황제,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일본국 황제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일본국 황제는 공로가 있는 대한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대한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대한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일본국 정부는 성의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 황제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