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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에서 일본군들을 대파한 날

nyd만물유심조 2023. 3. 14. 09:34



1593년 3월14일(음력 2.12) 행주산성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이 일어난 날이다. 즉,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불리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금천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도 합세하여 총병력은 관군 3,000여명과 의병 6000여명 등 병력은 총 9,0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일부에선 관군 3000여명만 있었다고 함).

행주산성의 지형은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의 형태였다. 또한 행주산성은 말이 좋아 산성이었지 높이가 120 m 밖에 안되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였고 지대 역시 험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행주산성은 그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성벽도 매우 낮은 토성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토성 위를 목책으로 둘러싼채 싸움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총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였으며, 2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리장을 받아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도 이 전투에 참가했다. 3만의 대군세를 7개 부대로 나눠 차례로 공격해 왔었는데 1군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2군을 이시다 미츠나리, 3군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지휘하였다. 그야말로 정예 부대들이다. 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의 대장들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두 서군에 가담했는데, 이들 중에 결정적인 반목이 있었으니 바로 5군의 킷카와 히로이에, 그리고 7군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자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반목이 조선군에 유리한 측면을 제공했다고 볼 수있다. 이 전투에서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및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혔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행주대첩 전투상황을 요약해 보면 조선군의 화포 공격으로 총사령관 우키타와 2군 지휘관 이시다 미츠나리가 부상을 입으면서 일본군 4군도 물러나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4군이 박살난 뒤,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지휘하는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내책에 불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화공을 예상하고는 미리 물을 준비해 두었고 5군의 화공은 간단히 파해되었다. 조선군은 방어로 그치지 않고 되려 반격을 가해 5군을 후퇴시키고 킷카와에게 부상을 입히는 성과까지 거뒀다. 일본군 6군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가 지휘하는 군세였는데 서쪽의 비교적 완만한 비탈면을 올라와 공격하였다. 하지만 성벽을 지키고 있던 승병들이 느닷없이 석회(혹은 재) 주머니를 터뜨려 뿌려대는 바람에 6군은 일시적 실명과 호흡곤란을 겪으며 무력화된 후 오히려 출격한 조선군에게 격퇴되었다.

그러나 위기는 조선군이 아침부터의 싸움에 지치기 시작한 이때부터였다. 이후 6군에 이어 들어온 노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7군이 승병들이 지키던 서(북) 쪽을 뚫고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승장 처영과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일본군은 가히 인해전술이라 할만한 물량으로 조선군을 몰아붙였고,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백병전이었지만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운 터라 이 전투에서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한편,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패색이 짙어질 때쯤 기적 같은 구원이 도착했다.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과 충청 수사 정걸이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실어 한강을 거슬러왔던 것. 게다가 양천으로 가는 수십 척의 전라도 조운선이 지나갔는데 이것이 일본군에게는 이순신이 인솔하는 조선 수군의 원군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이들이 적의 후방쯤에서 내릴 기색을 보이자 일본군도 당황하여 비로소 물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때 일본군 1백여 명 이상을 참살했다고 한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행주대첩시의 성내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낭설이다. 이유는 76년 앞서 임진왜란 이전에 행주치마라는 용어가 존재하였다는 점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