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小雪)은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로 이 즈음부터 눈이 내린다고 하여 小雪이라고 한다. 이 때부터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여 점차 겨울 기분이 든다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따뜻한 햇볕이 간간이 내리쬐어 소춘(小春) 이라고도 불린다.
“小雪에는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듯 기온이 뚝 떨어져 영하의 날씨로 이어지므로 밭에 심어 놓은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을 담근다. 이 무렵이 되면 모든 농사일이 끝나며 논 가을갈이도 끝나고, 겨울농사인 보리나 밀, 마늘도 영하로 떨어지기 전에 다 심어야 하니까 농사철은 지났지만 논밭 뒷정리와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한다.
예전엔 타작한 벼를 말려 곳간에 쌓아 두는가 하면, 멍석에 무말랭이를 널거나 호박을 가늘고 길게 썰어 오가리를 만들기도 하고,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줄줄이 곶감을 매달아 말리느라 처마 밑이 온통 곶감으로 출렁이기도 한다. 제철 음식으로는 호박죽, 굴, 고구마 등이 있다.
옛 문헌에 보면 소설이 있는 음력 10월경에 상달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해 추수한 햇곡식과 과일들로 제사상을 차려 놓고 한해 농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에 대하여 하늘과 조상께 감사의 예를 올리는 것이다. 상(上)달이라는 말은 풍성한 수확과 더불어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는 달이란 뜻으로, 일년 열두달 가운데 으뜸가는 달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상달고사의 전통은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등 추수감사의 의미를 내포하는 제천의식으로 이어졌다. 이후 고려 때 팔관회(八關會)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민가에서 고사 혹은 안택으로 전승되었다.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대개 소설 즈음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때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는 손돌추위라고 하며, 뱃사람들은 소설 무렵에는 배를 잘 띄우려 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 손돌바람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23대 고종이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몽진을 가던 때라고도 하고, 조선시대에 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仁祖)가 한강을 건너던 때라고도 한다. 사공 중에 손돌(孫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피난을 가는 왕을 모시고 뱃길을 서둘렀지만, 왕이 보아하니 손돌이 자꾸 일부러 그런 것처럼 물살이 급한 뱃길을 잡아 노를 젓는 것이었다. 왕은 의심이 갔다. 그래서 신하를 통해서 물살이 세지 않은 안전한 곳으로 뱃길을 잡으라고 하였지만 손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은 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선상에서 손돌을 참수(斬首)하고 말았다. 손돌은 죽기 전에 억울함을 하소연하였지만 소용이 없음을 알고 바가지를 하나 내놓으며 물에 띄운 바가지가 가는 길을 따라 뱃길을 잡으라고 말하였다. 물살은 점점 급해지고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손돌이 가르쳐 준대로 바가지를 물에 띄웠다. 바가지는 세찬 물살을 따라 흘러갔으며, 왕을 실은 배도 그 뒤를 따랐다. 무사히 뭍에 내린 왕은 그때야 비로소 손돌의 재주와 충심을 알았다. 또 다른 전설에서는 손돌을 죽인 후에 더더욱 세찬 바람이 불고 물살이 급해졌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싣고 가던 말의 목을 잘라 제사를 모셨더니 파도가 잠잠해졌다고도 한다. 뭍에 도착한 왕은 곧 후회를 하였지만 손돌의 목숨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덕포진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장지(葬地)를 정해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이때가 음력 10월 20일경이었는데, 매년 소설 즈음인 이맘때가 되면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 무렵에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