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인들도 인공 수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여주듯, 물의 경영은 문명의 필수 요건 중 하나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는 수(隋)나라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무려 800여 년에 걸쳐 완성됐다. 수나라 몰락의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리한 운하 공사였을 만큼 강대국들마저 운하 건설 이후 국가 재정이 휘청거리는 경우들도 있다.
지금까지 바다를 잇는 운하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의 파나마 운하, 두 곳이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직접 운하를 만든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바다 운하를 건설했다면 당대 최강의 국가다. 하지만 이집트나 파나마는 최강으로 불릴 만큼의 재정을 가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 파나마는 운하 건설 이후 탄생한 국가다.
•수에즈 운하 건설
수에즈운하 건설은 프랑스인 엔지니어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제안해 영국·프랑스가 1859년 착공했으며 1869년 11월에 끝났다.
수에즈 지협((地峽)에 운하를 만들 생각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 왕조는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동서 방향의 운하를 건설했다고 한다. '파라오의 운하'로 불린 이 뱃길은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했다. 이집트를 지배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도 이 지역에 운하를 놓았다. 그는 이집트의 자가지그에서 수에즈로 이어지는 운하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다리우스 1세는 대역사 성공을 자축하는 비문을 곳곳에 세웠다.
하지만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는 아니었다. 후에 이 뱃길은 천재지변, 전쟁으로 훼손됐으나 여러 차례에 걸친 개수(改修)로 명맥을 이어갔다. 현재도 같은 루트를 관개용 수로가 지나고 있다.
근대 들어와 운하를 만들자는 구상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17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라이프니츠는 운하를 만들자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기술상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폴레옹도 이집트 원정 때 구체적인 운하 건설을 검토했다. 영국의 인도무역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측랑을 한 결과 홍해 수면이 지중해보다 10미터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되면 갑문이 필요하다. 결국 계획은 포기됐다. 하지만 측량결과는 잘못된 것이었다. 지중해와 홍해 간 수위 차는 없었다.
그때부터 프랑스는 수에즈 지역에 관심이 많아졌다.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등장하면서 가속을 밟기 시작했다. 레셉스는 나폴레옹의 구상 등에 자극을 받아 1854년 운하 부설을 실질적인 이집트 국왕이었던 오스만터키의 이집트 총독 사이드 파샤에게 제안했다. 레셉스는 1830년대 프랑스의 주이집트 대사를 지냈던 외교관이자 엔지니어였다. 외교관으로 이집트에 머물면서 파샤의 가정교사도 했기 때문에 그와 친했다.
당시 이집트는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립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 1858년 12월 파샤는 레셉스와 국제수에즈운하 회사를 설립했다. 레셉스는 99년간의 운하사업권을 얻었다. 이집트는 매년 이익의 15%를 받기로 했다.
1859년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는 이집트 농민들의 부역으로 이뤄졌다. 사실상 무상노동이었다. 최대 4만명까지 동원됐다. 해가 뜨고 해가 질때까지 물에 잠긴 채 일했다. 채찍도 사용됐다. 부역으로 농사 일을 못해 가족들은 굶주렸다. 10년의 공사 기간중 2만명 정도가 숨졌다. 이는 이집트 농민들 사이에 외국인 혐오를 가중시켰다.
그 사이 영국은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을 움직여 공사 방해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운하는 1869년 11월 완공됐다. 이로써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야 했던 유럽과 아시아간 항로는 무려 8000km나 단축됐다. 지중해 쪽 입구에는 새로 항구가 건설돼 사이드 파샤의 이름을 따 '포트사이드'로 명명됐다.
하지만 운하회사는 경영난에 빠졌다. 수에즈 운하를 지켜만 보던 영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875년 영국의 디즈레일리 총리는 서둘러 유대계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이집트 측 주식을 매수했다. 이를 계기로 수에즈 운하는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운영하게 됐다. 이는 영국의 이집트 진출의 계기가 되었다. 1882년 이집트군의 육군 대령 아흐메드 아라비가 민족주의 반란을 일으키자 영국은 개입해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경제적·전략적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중요성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이 뤼순(旅順)항을 기습공격하자 러시아는 지중해의 발트함대를 급히 파견했다. 그런데 영국은 발트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거부했다. 발트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진이 빠진 발트함대는 대한해협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연합함대에 궤멸됐다. 이로써 일본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후에 레셉스는 중미의 파나마 지협에서 파나마 운하 개착에 나섰다. 그러나 가혹한 자연조건에 막혀 실패하고 1894년 사망한다. 파나마 운하 부설권은 미국의 손에 넘어가 1914년 완공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가 대두하자 1919년 이집트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22년 영국은 이집트 왕국의 명목적인 독립을 인정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 지대의 군대 주둔권은 계속 보유했다.
이런 상황은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급변한다. 1952년 육군 대위 가말 압델 나세르는 청년장교단을 이끌며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1953년 비로소 영국군은 수에즈 운하지대에서 철병했지만 여전히 영국 자본에 의한 운하회사의 운영은 계속되고 있었다.
1956년 나세르는 소련을 등에 업고 엄청난 결단을 내렸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한 것이다. 이는 중동을 격랑으로 몰아넣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 영향력 확보를 위해 비밀리에 군사작전을 수립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을 포섭했다.
3국의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해 시나이반도에서 이집트군을 축출한다. 그러면 영국과 프랑스가 평화유지를 명목으로 개입해 수에즈 운하 일대를 중립지대로 설정한다. 이후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차지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찾아오는 것이다.
1956년 10월, 이스라엘은 계획대로 시나이 반도로 침공을 시작했다. 2차 중동전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침공 하루 후 영국과 프랑스는 양국간 정전 협정을 중재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황이 전개됐다.
나세르는 결사항전 태세로 들어갔다. 수에즈 운하를 폐쇄했고 이집트 국민들은 나세르를 지지했다. 전쟁은 3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돌아갔지만 이후 정세는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은 중동에서 영·프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견제하며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소련은 핵미사일 발사 등 물리적 실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미국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견제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영·프에게 자금줄을 차단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유엔의 중재로 정전이 선포됐고 3국은 이듬해 완전 철수를 하게 된다. 이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또한 막대한 전비 지출로 인해 국가재정에 타격을 입었다. 이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침략전쟁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반면 이집트의 나세르는 미소 냉전체재를 적절히 이용해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내 영국 식민지 잔재를 일소하면서 아랍권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상황이 진정되면서 1957년 4월 운하 통항이 재개됐다
하지만 1967년 '6일 전쟁'으로 불리는 3차 중동전이 터지면서 운하는 다시 폐쇄됐다.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들어오자 이집트는 화물선 14척으로 운하를 막아버렸다. 1974년 4차 중동전쟁이 끝나고 전후 협상에서 운하 재개를 협의했고 1975년 6월 재개통됐다. 그때까지 운하는 8년동안 막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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