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말, 베를린은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종전 후 독일과 베를린은 각각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나누어 관리하였는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구분은 이때 생기게 되었다. 장벽은 동·서 베를린 사이에 약 45.1km의 두꺼운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약 5000명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최소 1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독 탈주자가 많아지자 이를 막으려고 1961년 8월 13일에 만들어진 이후 점차 이 장벽은 보강되었으며, 1989년 11월 9일 자유 왕래가 허용된 이후 차례로 장벽이 붕괴되었다. 일부는 기념으로 남겨져 있다.
-장벽붕괴 상황
오랜 분단 속에서 동독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1989년 10월 라이프치히를 시작으로서 동독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인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방법을 고심하던 동독 정부는 11월 9일 여행자유화 법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발표로 인해 독일이 통일을 이루게 될지 그 누가 알았을까.
이날 오후 7시 생중계되던 기자회견에서 법안을 발표하던 동독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언제부터 이 법안이 시행되느냐”는 질문이 날아왔다.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바로 참석하는 바람에 당 지도부에서 결정한 정책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샤보프스키 대변인은 순간 당황해 이렇게 답한다. “지체 없이, 즉시(Sofort, unverzüglich).”
사실 샤보프스키 대변인의 대답은 큰 말 실수라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여행자유화 법안은 다음날인 10일에 시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동독·서독 기자들은 이 법안이 국경 개방이 아닌, 단순한 여권심사 기간 단축 등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독일어에 서툴렀던 이탈리아 통신사 ANSA의 기자 리카르도 에르만이 이를 ‘베를린 장벽의 철거’라고 착각하면서, 이는 긴급 뉴스로 보도가 나가게 된다. 에르만은 ANSA 본사에 이 소식을 전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The Berlin Wall has collapsed)’라는 제목으로 긴급뉴스(flash news)로 보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당시 ANSA 외신부장은 믿을 수 없다며 그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며 거부했으나 “현장의 기자를 믿어달라”는 에르만 기자의 간청에 결국 보도한다.
이 엄청난 오보는 곧바로 전 세계로 퍼졌고 이 소식을 접한 동독인들은 공구를 들고 나와 장벽을 부수기에 이른다. 장벽을 지키고 있던 동독 국경수비대원들은 이들을 막으려고 애썼으나 통제 불가능한 엄청난 인파가 몰리면서 그저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수비대원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상부의 지시가 없자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서베를린으로 가는 출입문을 개방했다. 열린 문을 통해 동독인들과 서독인들은 서로를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8년간 냉전의 상징이자 두 진영으로 양분했던 베를린 장벽은 총 한 발, 피 한 방울 없이 그렇게 무너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통일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