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는 천인 중 천인이던 무당임에도 왕족에게 붙는 군(君)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 있다. 군이란 칭호, 군호란 조선 성리학자들의 우상이던 이율곡의 어머니가 받은 ‘사임당(師任堂)’이란 ‘당호’보다 한 수 위다. 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파격적 대우를 받았던가.
고종실록(高宗實錄)에 따르면 1894년 7월 전 형조참의 지석영이 고종에게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眞靈君)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녀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고 상소를 올렸다.
고종 즉위 뒤 섭정에 나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많은 실책에도 불구하고 허물어진 나라 살림을 되돌려 놓는 등 왕권강화에 기여한 공 또한 적지 않다. 대원군이 그나마 쌓아둔 이 공을 까먹은 것이 바로 명성황후다. 사치와 낭비가 심했고, 민씨 친족들에게 일일이 벼슬 챙겨 주느라 나라의 기강은 엉망이 됐다.
이유는 있다. 왕권강화를 위해 ‘정치적 배경’ 없는 며느리로 골랐는데, 그럴수록 거꾸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기댈 곳은 오직 아들과 친족 뿐이어서다. 고종은 후궁에게서 먼저 아들을 얻었다. 무당, 굿, 제사가 잇달았다. 아들(훗날 순종)을 낳았으나 병약했다.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금강산 일만이천봉 위에다 재물을 가져다 바치고, 날마다 백미 500석으로 지은 쌀밥을 한강에 뿌리기도 했다. 국가재정도 재정이지만, 사람들 눈에 이런 행동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그 결과 가운데 하나가 임오군란이다. 돈을 엉뚱한 데다 쓰니 병사들에게 13개월이나 월급을 주지 못했다. 모래 섞이고 다 썩은 쌀을 월급이랍시고 내놓자 병사들이 폭발했다. 항의하는 병사들을 붙잡아다 사형시키겠다 한 이도 민씨 집안의 민겸호였다. 난을 일으킨 병사들은 민겸호를 처참하게 때려 죽였다. 민씨 집안 우두머리 명성황후도 당연히 처결대상이었다. 눈에 핏발이 선 채 피 뚝뚝 떨어지는 칼을 휘두르는 군인들은 창덕궁까지 치고 들어갔다.
창덕궁을 겨우 빠져나온 명성황후는 배탈, 설사, 학질에 시달리며 충주까지 가까스로 도주했다. 충주로 간 것 역시 충주목사가 민씨 친족인 민응식이어서다. 시민군을 피해 충주까지 도망한 왕비의 입장에서는 은신처 주변의 주민들도 무서웠을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추진한 시장개방(이른바 개화)으로 인해 백성들이 경제적 위협을 느꼈고 그런 분위기가 하급 군인들에 대한 부당대우 문제와 맞물려 임오군란이란 민중 봉기로 이어졌다. 때문에 왕비는 일반 백성들이 한없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웬 무녀가 은신처에 들이닥쳤으니, 왕비는 순간적으로 공포심에 떨었을 것이다. 그런 직후에 무녀가 신령님을 운운했으니, 공포심은 의아함과 혼란으로 변했을 터. 공포심이 걷히자 왕비는 자신이 환궁할 수 있겠는지, 환궁한다면 언제가 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무녀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8월 초하루에 환궁하실 것이니, 준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해 음력 8월 초하루는 양력 9월 12일이었다. 9월 12일이면 환궁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날은 7월 24일 이후의 어느 날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환궁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권력을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된 왕비가 불과 50일 이내에 환궁하여 권력을 되찾을 것이라고, 꽤 과감하고 자신만만하게 예언한 것이다.
무녀의 말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왕비는 연금 상태인 고종과 은밀히 연락하면서 상황의 반전을 도모했다. 그는 청나라 정부에 사람을 파견해 그 나라 군대를 은밀히 끌어들였다.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시민군과 대원군을 물리칠 생각이었다. 왕비와 고종의 비공식 파병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는 조선 정부의 공식 요청도 없는 상태에서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시장개방으로 서양세력이 몰려들게 될 조선을 차제에 장악해둘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 길로 청나라는 3천명의 군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뒤이어 한양 진입 작전을 전개했다. 그런 뒤 흥선대원군을 납치해서 청나라에 압송하는 한편, 시민군 주역들을 체포해서 임오군란을 분쇄해버렸다. 군란 발발 1개월 만의 일이다.
이렇게 해서 한양이 정리된 뒤인 1882년 9월 12일, 왕비는 궁궐로 복귀하고 권력을 되찾았다. 그날 왕비의 뒤편에는 공식 타이틀이 없는 여성이 서 있었다. 궁녀도 아닌 여성이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궁궐과 조정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을 그 여성은 바로 무녀 진령군이다.
무녀 진령군은 그렇게 해서 조선 정치무대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무녀들은 조선왕조 들어 유교주의 확산 속에 차별을 받다가 구한말에 기독교 전파와 함께 한층 더 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무녀가 정치 실세로 등장했으니, 당시로써는 꽤 대단한 일이었다.
진령군은 왕비의 환궁 날짜를 정확히 맞췄을 뿐만 아니라 환궁을 준비하도록 격려까지 해주었다. 공포심에 떨고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왕비가 '새 마음'을 갖고 정권을 탈환하도록 그는 도움을 베풀었다. 그랬으니, 왕비는 진령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인해 진령군을 최측근에 두면서, 진령군은 왕비의 비선 실세로 거듭났다.
그 무녀가 진령군으로 불린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진령군의 군(君)은 왕자급에 해당하는 고위급 작위다. 많은 경우에 공신들이 이런 작위를 받았다.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무녀가 왕자급 작위를 받은 사실로부터, 왕비가 그를 얼마나 총애하고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왕비가 진령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양 성내인 지금의 종로구 명륜동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세운 데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왕비의 신임을 바탕으로 진령군은 정치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진령군이란 작위만 가졌을 뿐, 공식적이고 구체적인 직책도 없이 정치에 관여한 것이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왕비는 진령군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다. 왕비는 관찰사 및 사또 임명과 관련해서도 진령군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었다. 인사권에까지 개입했다는 것은 비선 실세인 진령군이 명성황후와 고종의 국정운영에도 깊이 개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돈으로 관직을 거래하는 매관매직 풍조가 만연했다. 지방관의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진령군이 지방관 인사에 개입했다는 것은 이를 통해 정치자금을 많이 모았음을 의미한다. 왕비의 신임을 받는 비선 실세가 그런 돈을 개인적으로 다 썼을 리는 만무하다. 그 돈의 상당 부분은 왕비의 비자금으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진령군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특이한 정치 실세였다. 그는 왕비의 정치문제뿐만 아니라 건강까지 직접 챙겼다. '헬스 트레이너'를 추천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왕비의 건강을 돌본 것이다. 왕비가 아프다고 하면 직접 왕비의 몸을 주무르기도 했다. 그러면 왕비의 몸이 좋아지곤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무녀가 의사 역할을 겸했다. 그래서 진령군이 왕비를 치료하는 모습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특이하지만, 당시 사람들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비선 실세 겸 주치의로서 왕비의 옆자리를 굳건히 지켜나갔다.
진령군이 막강한 비선 실세가 되자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속에는 장차관급 인사들도 많았다. <매천야록>의 표현에 따르면, 장·차관급들마저 앞을 다투어 진령군에게 아부했다. 심지어는 진령군을 누님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장·차관급들이 누님이라 부른 것을 보면, 왕비를 만났을 당시의 진령군이 나이가 꽤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동네 남자들이 누님이라 불렀다면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조정의 권세가들이 그렇게 불러주었으니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임오군란 이후로 12년 동안 조선 정치는 청나라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을 도운 청나라가 내정간섭 세력으로 바뀐 것이다. 전통적 동맹국인 청나라가 조선을 집중적으로 간섭하던 이 12년간이 진령군의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권불십년이라 했다. 명성황후를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한 진령군은 황후의 쇠퇴와 함께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1894년에 일본군이 한양을 점거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명성황후의 권력은 몰락하고 말았다. 또한 1895년에는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다. 그러자 진령군 역시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전성기는 그렇게 갑자기 끝나버렸고 1896년, 희망을 잃은 그녀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중에 망국의 한을 품고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 써 둔 이후 행적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무당은 관운장의 영을 받은 딸이니 사당을 지어 받들게 해 달라고 했고 이에 명성황후는 숭인동에다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다. 무당은 수시로 고종 내외를 만났고, 고종 내외는 상을 내렸다. 이를 안 관리들은 진령군을 ‘누이’라 부르거나 ‘의붓아들’을 자처했다. 김해 출신 이유인이란 자가 속임수를 써서 진령군에게 자신이 귀신을 부린다고 했다. 이유인은 이후 양주 목사가 되었으며 진령군과 모자 관계를 맺었다.”
황현은 강경보수에 가까운 인물이고 매천야록이 일종의 야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장이 섞여들 수 있다. 그러면 좀 더 정제된 정보는 어떨까. 사간원 정언(正言) 안효제가 내놓은 기나긴 탄핵문의 핵심 구절은 이렇다. “요사이 괴이한 귀신이 몰래 여우 같은 생각을 품고 스스로를 성제(聖帝)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한 이가 “잇속을 늘리기 즐겨 하며 염치가 없는 사대부들을 널리 끌여들여서 아우요, 아들이요 하면서 서로 칭찬하고 감춰가며 가늠할 수 없는 권세를 부려 위엄을 보이거나 생색”을 냈다 한다. 이 상소문을 올린 안효제는 당연하게도 유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