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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라 프리야다르시니 간디" 인도 총리 암살

nyd만물유심조 2025. 10. 31. 13:39



1984년 10월 31일 인도의 네 번째 총리인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śinī Gāndhī) 여사가 자신의 집무실로 가던 도중 경호원 2명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숨졌다.

1917년 인도 독립의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초대 인도 수상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간디여사는 `리틀 인두(작은 인도인)`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당찬 소녀였다. 인도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뒤 스위스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하고 귀국, 21세때인 1938년 아버지 네루를 따라 반영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64년 네루수상 사망에 따라 집권한 샤스트리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낸 후 1966년 제3대 수상으로 선출됐다.

인도의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총리이며 정확하게는 1기 집권시 민주 정부의 총리로 취임했다가 당내 권력 투쟁에서 이기며 점점 철권 통치 스타일로 변해갔다. 그러다 1977년 재신임 총선에서 야당인 자나타당에게 패해 물러났지만, 이후 1970년대 말 자나타당 정권의 내분으로 1980년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인도의 여러 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크교도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시크교도들의 분노가 발생했고 결국 암살로 이어졌다.

- 암살
인디라 간디 수상은 1984년 10월 31일 아일랜드 방송국에서 만드는 다큐멘터리에 쓸 피터 유스티노프와의 인터뷰를 촬영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었다. 이때 문 양쪽으로 서 있던 시크교도 출신 경호원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이 그녀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사트완트 싱의 경우 인디라 간디에게 기관단총으로 30발이 넘는 총탄을 난사하며 그녀를 잔혹하게 공격했다.

인디라 간디는 그때까지만 해도 숨은 붙어있었기에 즉각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총탄을 30발 가까이 직격으로 맞았던만큼 워낙 부상이 심각해 오후 2시 20분에 향년 66세로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후 대권은 그대로 그녀의 아들이자 비공식적 후계자나 다름없던 라지브 간디에게로 넘어갔다. 인디라 간디의 뒤를 이어 인도 총리가 된 장남 라지브 간디도 테러로 사망해 비극의 가문이 되었다.

- 집권시 상황
1966년 1월, 네루 총리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집권당이던 인도의회당(Congress Party)의 중진 의원들은 40대의 인디라 간디를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오판이었다. 당내 기득권 세력과의 권력투쟁을 거쳐 1969년 당을 완전히 장악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71년 치른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2/3 이상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며 권력 기반을 공고하게 다졌다.

같은 해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이 서파키스탄(현재의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무력으로 지원하여 방글라데시라는 국가의 탄생을 도와줌으로써, 인도를 넘어 사실상 서남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지도자로서 자리를 굳건히 하였다. 간디 총리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면서 유력한 야당 지도자들도 그녀를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여신인 두르가(Durga)라고 칭했다는 소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투표에서 각종 불법행위를 저질렀던 그녀는 자신의 불법행위가 발각되자 그야말로 폭주기관차에 올라타 버린다. 21개월간 지속된 비상계엄 기간 중 무려 11만 명이나 되는 야당 정치인, 인권운동가, 언론인 및 대학생을 체포해서 구금했다. 비상계엄을 통해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이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인도의 독립 직후 제헌 국회에서 이루어진 논의에서 비상계엄 관련 조항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유력 야당 정치인도 잊지 않고 체포해서 감옥으로 보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거머쥔 인디라 간디 정부 앞에 사법부도 무릎을 꿇었다. 언론계도 친정부 메시지로 뒤덮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