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하피첩(霞帔帖)
3번째 그림(梅花倂題圖<매화병제도>) 글씨 해설,
치마폭으로 가리개를 만들어 그 가리개에 행복한 혼인생활을 축원하는 매조도를 그렸다. 두마리 새가 앉아 한 곳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그러면서 부부가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아빠의 마음을 담은 시와, 가리개를 만든 사연을 적었다.
翩翩飛鳥(편편비조) 훨훨 나는 새 한 마리 날아와
息我庭梅(식아정매) 우리 뜰 매화나무에서 쉬네.
惠然其來(혜연기래) 그윽한 그 매화향기에 끌려
有烈其芳(유열기방) 반갑게 찾아왔네.
爰止爰棲(원지원서) 이곳에 머물고 둥지 틀어
樂爾家室(낙이가실)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華之旣榮(화지기영) 꽃이 이미 활짝 피었으니
有賁其實(유분기실) 토실한 열매가 맺겠네.
위 사진 4번째가 1첩,2첩,3첩이다.
5번째 사진의 하피첩 내용:한글로 읽기.
병처기폐군 천리탁심소 세구홍기퇴 창연염쇠모
재성소서첩 요사계자구 서기염이친 종신전페부
하피첩은 전남 강진에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이 1810년 부인 홍 씨가 보내온 낡은 치마를 정성스레 잘라 만든 작은 서첩이다. 하피란 '붉은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다산이 부인의 치마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다산은 여기에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을 적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장만한 치마에 아버지의 글을 적은 자손들에겐 그야말로 집안의 보물인 셈인데, 실제 보물 1683-2호로 지정돼 있다.
민속박물관에 따르면 하피첩은 원래 네 첩이었으나 현재는 세 첩만 알려져 있다. 민속박물관에서 경매를 통해 구입할 당시 각 첩의 표지에 제목이 일부 남아있으나 첩의 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유물 보존처리를 위해 두 권의 첩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을’과 ‘정’이라는 글자를 통해 '갑을병정' 순서로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
다산은 1첩에서 두 아들에게 가족 공동체와 결속하고 소양을 기르라는 당부를 했다. '효제'(孝悌)가 인을 실행하는 근본이라 말하며 부모와 형제간 화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비록 귀양살이하는 가문의 자손일지라도 분노를 참고 화평하기를 바랐다. 아들과 손자 세대에 이르면 과거와 경제에 뜻을 둘 수 있으니, 문화적 안목을 잃어선 안 된다고도 했다.
2첩에선 삶의 실천 방향을 제시한 ‘경직의방(敬直義方)’이라는 경구와 함께 자아 확립과 삶의 자세에 대해 썼다. '경직의방'은 공경하는 바른 마음가짐으로 정의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산은 ‘쓰러진 나무에 싹이 나고’라는 사언시를 통해 집안은 비록 풍비박산 났지만 실망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닦으라고 했다. 또 벼슬이 없어 농장을 물려줄 수 없으나 대신 부지런할 ‘근’자와 검소할 ‘검’ 두 글자를 남긴다고 적었다. 이 두 가지는 좋은 전답보다 나아서 한 평생 쓰고도 남는다고도 했다.
또 3첩은 주로 학문과 처세술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다산은 온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글을 연구해 통달하기를 당부했다. 학문뿐 아니라 재산을 베풀고 달관하는 등 처세술에 대하여도 이야기하고 있다.
'다산'이라는 호의 뜻은, 정약용이 천주교 문제로 18년 동안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윤박이라는 지방 선비가 찾아와서는 정자를 하나 정약용에게 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계속 거절하였다. 그러나 윤박은 끈질기게 권유하자, 정약용은 별 수 없이 그 정자를 받았다. 그 정자의 이름이 '다산 초당'인데(초당에 위치한 만덕산은 자연의 차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 마을사람들이 부르기를 다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동안 머물렀던 오막살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훌륭했기 때문에, 호를 '다산'이라고 지었다. 한마디로 다산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호도 다산으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