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과정, 피해, 참전국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폭풍" 이라는 작전명 하에 북한은 전면적으로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 부로 휴전된 전쟁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전협정에 따라 정전된 것이라서 만일 남한과 북한 사이에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그건 2차 한국 전쟁이 아니라 한국 전쟁이 재발한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대한민국은 정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 · 개성 · 동두천 · 춘천 · 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 · 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공격하였고, 북한군 6사단과 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북한군 4사단과 3사단은 한국군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한국군 6사단을(춘천 지구), 북한군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한국군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는 할 수 없이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5사단 및 제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적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인민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9일에는 대전을 점령한데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였다. 전쟁 개시 두 달 여만에 남한 전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6월 27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7월 8일에는 대구, 8월 18일에는 부산을 임시수도를 정하는 등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6.25 전쟁"의 과정은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 단계는 인민군의 공세기로서 전쟁 개시에서 9월 15일까지의 상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이 진출했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UN군의 전면적인 공세 단계로서 9월 15일에서 11월 초까지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금 중부 지방에서 교착되는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공세 단계로서 1950년 11월 초에서 1951년 1월까지의 단계, 네 번째 단계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이 모색되는 단계로서 1951년 2월에서 5월까지의 시기, 마지막으로 휴전협상과 소모전의 단계로서 1951년 5월에서 정전까지의 단계이다.
북한의 6.25 전쟁 개시는 즉각적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가져왔다. 전쟁개시 직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해·공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UN군을 조직하였다. 7월 1일에는 UN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6.25 전쟁에 개입하였다.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압록강 근처에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압록강 근처에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금 중부전선에서 교착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는 어려워졌다. 이에 소련 UN 대표 말리크는 전쟁 당사국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최고사령관의 휴전 제의와 김일성·팽덕회의 동의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었다. 양측은 2년이 넘는 휴전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조인하고 전쟁을 중지하였다
6.25전쟁 과정
1950년 6월 25일 : 북한의 새벽 기습남침
1950년 6월 28일 : 서울 함락
1950년 7월 1일 : UN군 개입
1950년 8월 : 전국을 빼앗기고 낙동강 방어라인 구축
1950년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
1950년 10월 19일 : 평양 점령
1950년 11월 : 중공군 개입
1951년 1월 : 1.4 후퇴
1951년 ~ 1953년 : 지리한 공방 전투
1953년 7월 27일 : 휴전 협정
인명피해는 먼저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여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 여명, 부상자 48만 여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여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 여명, 부상자 20만 8천 여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 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한국 전쟁은 그러나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던 전쟁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남북한의 민간인 사망자 통계를 보면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여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여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여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6.25 전쟁 당시 참전국은 1951년 초까지 총 16개국이었다. 군대파견을 신청한 국가 21개국 중 실제로 파병을 한 16개 국가의 분포는 미국, 캐나다 북미 2개국, 콜롬비아 남미 1개국,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태국) 아시아 4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아프리카 2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터키 유럽 7개국이다.
이들 참전국들은 유엔이 요구하는 최소규모인 1개 대대 병력(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하였다. 주요 참전병력은 1953년을 기준으로 영국 약 1만 4,200명, 캐나다 약 6,100여 명, 터키 약 5,500여 명, 오스트레일리아(호주) 2,200여 명 등이다. 1953년까지 한국전에 참여한 연합군은 미국을 제외하고 총 3만9천여 명에 이르며, 미국을 포함할 경우 총 34만 1천여 명에 이른다. 또한 유엔 결의문에 따라 회원국 및 국제기구들이 각종 지원을 하기 시작했는바, 5개국(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이 병원 혹은 병원선 등 의료지원을, 그리고 40개 회원국과 1개 비회원국(이탈리아)과 9개 유엔전문기구가 식량제공 및 민간구호 활동에 참여하였다.
중국의 개입이후 미국은 나토(NATO) 증강 등의 약속에 비추어 유럽국가와 기타 회원국들의 참전을 요청하였으나,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의 참전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타이(태국) 등 4개국에 국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