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의 왕위 계승 역사와 왕자의 난 일지
사우디 국부(國父)인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는 1953년 숨을 거두기 전 왕위를 형제끼리 연장자 순으로 상속하고 아들에겐 물려주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건국 과정에서 아라비아반도의 부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20여개 부족장의 딸과 혼약을 맺었고, 이들 사이에서 왕자만 44명을 낳았다. 첫째 아들과 막내아들의 나이는 웬만한 부자지간 이상으로 벌어졌다. 압둘아지즈는 한 왕자가 왕위를 받아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하는 식으로 가면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기 위한 '왕자의 난'이 끊이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낸 대안이 '형제 계승'이다.
이에 따라 압둘아지즈가 죽고 2대 국왕은 장남 사우드(재위 1953~1964)가 됐다. 이어 3대 국왕은 사우드의 이복동생 파이살(1964~1975), 4대는 칼리드(1975~1982), 5대는 파흐드(1982~ 2005), 6대는 압둘라, 7대인 현 국왕은 살만이 됐다. 초대 국왕의 아들끼리 왕위 계승을 한 것이다.
하지만 '형제 계승'에는 문제가 있었다. 왕위가 한 세대에서 수평 이동을 하다 보니 국왕의 나이가 점점 많아졌다. 2대 국왕 사우드가 취임할 때 나이는 51세였는데, 3대 파이살은 58세, 4대는 62세, 5대는 61세, 6대는 81세에 왕좌에 올랐다. 왕이 되기를 기다리다 먼저 죽는 왕세제가 나왔다. 사우디 왕실에 '노인 정치(gerontocracy)'라는 별칭도 붙었다.
살만은 2015년 1월 80세의 나이로 국왕에 오르면서 자신을 마지막으로 형제 상속의 전통을 끊었다. 취임 직후에는 왕세제로 자신의 이복동생 무크린을 책봉했지만, 석 달 뒤 그를 실각시켰다. 대신 자신의 큰조카인 무함마드 빈나예프를 제1 왕세자, 친아들인 빈살만을 제2 왕세자로 지명했다. 왕위 계승이 초대 국왕의 아들 세대에서 62년 만에 손자 세대로 넘어간 것이다.
이 구도도 다시 요동을 쳤다. 빈살만이 지난 6월 친위 부대를 동원해 사촌형인 빈나예프를 감금하고 '왕세자' 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1차 왕자의 난'이다.
이후 빈살만은 권력 강화에 올인하며 방어에 나섰다. 초대 국왕의 유언을 깨고 왕위를 부자 세습하는 첫 인물인 데다 사촌형의 세자 자리까지 빼앗으며 연장자 우선의 왕위 계승 전통을 깬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정보 기관을 장악한 그는 이달 들어 공격 태세로 전환했다. 지난 4일 정예군을 동원해 잠재적 정적(政敵)인 사촌형 왕자들과 그의 측근들을 부패 혐의로 대거 체포하는 '선제공격'에 나섰다. '2차 왕자의 난'이다.
빈살만이 이렇게 기존 세력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초대 국왕의 여덟째 부인이자 유력 왕비인 수다이리의 손자인 점이 유리하게작용했다. 초대 국왕은 22명의 왕비를 뒀고 왕비들이 각각 여러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왕실은 왕비별로 정치적 파벌이 형성됐다. 수다이리파(派)는 5·7대 등 두 국왕을 배출했고, 그 과정에서 정부 요직을 독식해 가장 힘센 세력이 됐다.
빈살만은 호전적인 성격의 야심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손자병법' 등 병법서를 즐겨 읽었다.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을 보인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독일 정보부 외교전문을 인용해 사우디의 예멘 내전 개입을 결정한 인물이 바로 빈살만이라고 했다. 살만 국왕도 2015년 그가 30세일 때 핵심 보직인 국방장관으로 발탁해 군 관련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사우디에서 줄곧 학창 시절을 보낸 국내파이지만 국가개조 정책을 추진해 성공시킨 아랍에미리트(UAE)의 왕세제 무함마드 빈자이드 알나흐얀을 멘토로 삼을 정도로 개혁·개방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빈살만이 여성 운전 허용, 비키니 착용 가능 관광특구 설치 같은 파격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된 것도 두바이·아부다비 모델을 참고한 것이다. 반면 50·60대의 왕실 기성세대에 퍼져 있는 이슬람원리주의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보여왔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와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국제 정치 감각이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이번 왕자의 난을 앞두고도 쿠슈너와 이 문제를 상의해 미국의 지지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1월7일 사우디 정부 소식통을 통해 사우디 정부가 체포한 왕자들의 개인 은행계좌 1200여개를 동결했다면서 부패 혐의를 단속해 8000억달러(약 892조3200억원) 상당의 자산을 압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진행상황
이번 사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위계승자인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가 권력을 강화하고, 국가의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모하메드 왕세자의 권력강화가 피의 숙청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11월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사우디 정부 관리는 반부패 조사과정에서 11명의 왕자, 4명의 현직 장관 등 60여명을 부패 혐의로 체포했고, 이들은 현재 수도인 리야드에 있는 리츠칼튼 등 호텔에 구금됐다고 밝혔다. 또한 이날 왕자 한명이 사우디와 예맨간 국경 인근에서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는 세계적인 부호 중 한명이며, 서구 산업계와 금융계에서도 유명인사다. 그의 투자회사인 킹덤홀딩스는 제너럴모터스, 애플, 시티그룹 등 미국 주요 기업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10년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와 손잡고 포시즌호텔을 운영하는 포시즌홀딩스 인수했다.
또한 체포된 왕자 중에는 알둘라 전 국왕의 아들로 사우디 군부의 핵심인물인 미텝 빈 알둘라 왕자도 포함됐다. 그는 지난 6월 무하메드 빈 나예프 당시 왕세자의 축출을 비난해온 왕자들 중 한명이었다. 살만 국왕은 지난 4일 미텝 왕자를 국가방위부 장관에서 해임하는 명령을 내렸다.
한 사우디 정부관리는 미텝 왕자의 제거는 모하메드 왕세자에 대한 왕위 양위를 위한 선결조건이었다고 지적했다.
일부 체포자들은 현재 수도 리야드의 리츠칼튼 호텔에 구금됐다. 리츠칼튼 호델은 지난 4일 모든 숙박객을 내보냈다. 두 명의 사우디 관리들은 다른 리야드시내 5성급 호텔들이 부패혐의자들의 구금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밝혔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