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마광수, 안됐다
마광수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니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추방 당해왔던 것에 대한 복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노모께서는 재작년 작고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9월5일 자살했다.
그는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쓴 후 외설 논란에 휩싸였으며 28세에 대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천재로도 불렸지만 이후 교수직에서도 해임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수업 도중에도 자주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유독 길쭉했던 '장미'였다. 그러면서 "너희도 피우고 싶으면 피워"라고 했다. 학생 몇몇이 교수와 맞담배를 피우는 자유분방한 장면이 펼쳐졌다. 무려 27년 전, 연세대 국어국문과에서 개설한 '현대문학 강독' 시간이었다. 교수는 야한 여자 타령을 하는 마광수였다. 누군가는 얼굴을 찌푸렸겠지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은 그 짜릿한 파격과 도발을 즐겼다.
성적 담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마 교수 강의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는 근엄한 척하는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성 엄숙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던진 화두는 '욕망하는 인간'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이었다. 과제는 성적 상상력을 발휘한 소설 쓰기였다. 에로틱한 것만 가르친 건 아니었다. 윤동주 시 연구, 상징시학, 에로스와 타나토스, 풍속의 역사, 희곡론 등 그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소설 '즐거운 사라'가 출간된 후 1992년 외설 논란으로 강의 도중 체포되면서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이었다. 혐의는 황당하게도 '음란문서 제조·반포'. 소설 내용이 지나치게 성적 충동을 자극해 문학의 예술성 범주를 벗어났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었다. 리얼리즘과 순수문학이 다툼을 벌이던 시절, 그는 양쪽 진영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세상은 자기와 다른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즐거운 사라'는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아니다. 주인공 사라는 천박한 여자지만 계몽주의 때도 아닌 20세기, 문학이라는 장르에 법의 잣대를 들이댄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내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이념 과잉의 시대였지만 '마광수는 마광수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게 제자들의 주장이었다. 에로틱한 판타지의 수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 침해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1998년 사면 복권됐지만 학계와 문단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했다.
오랜 세월 그에게 쏟아졌던 비난과 조롱은 그의 죽음 이후 '시대를 앞서 간 천재' '세상이 품을 수 없었던 자유주의자' 등 호의적으로 바뀌고 있다.
마광수 교수는 과거 등단 40년을 맞아 시집 ‘시선’을 내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난 실패한 인생”이라고 고백했었다.
-마광수의 자살자에 대하여란 글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말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말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말라. 그는 가장 솔직한 자.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마광수 ‘자살자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