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역사, 이슬람교 탄생과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교의 탄생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를 알아보기 전에 이 종파들의 상위에 있는 이슬람교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슬람교의 시조는 무함마드(마호메트)이다. 무함마드라는 인물은 아라비아의 상업 도시 ‘메카’에서 태어났다.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쿠라이시라는 소수 일족 출신인 그는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을 잃어 숙부인 아부 탈리브의 집에서 성장한다.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15살이 많은 덕망 높고 부유한 카디자와 결혼하면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된다. 상인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무함마드는 종교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여가시간과 여유를 얻는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현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일정 기간 은거하면서 금욕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610년,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풍족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메카 북쪽의 히라산에 있는 한 동굴로 찾아가 명상을 한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명상하던 중 그는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마을로 내려와 종교를 창시하게 되는데, 그 종교가 바로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하는 ‘이슬람교’이다.
이슬람교의 확장과 무함마드의 죽음
무함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4년이 지난 뒤인 614년부터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가 대중 전도를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메카는 다신교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유일신 신앙인 ‘이슬람교’가 전파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당시 메카 내의 쿠라이시족이 세력을 키워나가던 무함마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무함마드는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622년 7월 16일 이슬람교 신자들과 함께 메카를 떠나 메디나 지역으로 이주한다.(이를 ‘헤지나'라고 하며, 이 해가 이슬람력의 원년이다) 메디나 지역에서 세를 키운 이슬람교 신자들은 교단을 확립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630년 메카를 정복한다. 무함마드는 메카 정복 2년 후인 632년 예언자의 역할을 끝마친 후 가족들 품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당시 고대 아랍사회에서는 부족, 민족, 혈연을 기본으로 한 부족 공동체가 당연시됐다.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교는 당시 알라를 믿는 모든 이들이 곧 국민이 될 수 있는 교단 국가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코란)은 무함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은 610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는 632년까지 그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것이다.
선지자 무함마드 후계자 놓고 갈려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지게 된 배경은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둔 1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함마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을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시아파가 됐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丈人)인 아부 바크르를 추대했다. 결국 수니파 의견이 채택돼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정치·종교 지도자)가 됐지만 후계자 문제로 불거진 갈등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두 종파(宗派) 사이의 불화가 노골화한 것은 시아파의 알리가 제4대 칼리프에 올랐다가 곧 암살되면서부터다. 그 뒤 알리의 장남 하산마저 수니파 꾐에 넘어간 그의 아내에게 독살당하고, 차남 후세인도 수니파와 치른 전투에서 숨지면서 두 종파는 원수가 됐다. 현재 전 세계 16억 무슬림 중 90%가 수니파, 10%가 시아파이다. 사우디와 이란이 각각 수니파와 시아파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다.
이맘은 오직 무함마드의 혈통 뿐- 시아파
무함마드는 아들이 없으나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대신해 이슬람교를 이끌어 갈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다. 당시 세를 확장하고 있던 이슬람에 종교 및 정치상의 지도자는 분명 필요했으므로 창시자 무함마드를 대체할 수 있는 칼리프 제도가 확립된다. 아부 바루크, 우마르, 오스만, 알리 등 최초의 칼리프 4명이 탄생한다. 이들은 공동체의 합의에 따라 선출된 최초의 칼리프이기 때문에 ‘정통 칼리프’라는 호칭을 얻는다.
초대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절친한 친구인 아부 바루크이다. 당시 무함마드는 아들이 없고, ‘파티마’라는 딸이 있었다. 이 ‘파티마'와 결혼한 무함마드의 사위가 4대 칼리프인 ‘알리'이다.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알리를 지지했던 이슬람 교인들은 무함마드의 가족이며 그의 혈통을 낳을 알리를 칼리프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알리가 무함마드의 장례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 무함마드의 친구인 '아부 바루크'가 초대 칼리프의 자리를 차지한다. 알리의 지지자들은 전통과 혈통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매우 반발하며 4대 칼리프인 알리 이전 칼리프 3명을 찬탈자라 비난한다. 때문에 이들은 알리 이전의 3명의 칼리프를 그들의 이슬람 지도자 ‘이맘’으로 인정하지 않고, 4대 칼리프부터 1대 이맘이라 칭한다.
이후부터 무함마드, 그리고 알리를 지지하는 이들은 ‘시아투 알리’(알리의 파)라고 불리었고, 이후 ‘시아’라고 알려진다.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 - 수니파
3대 칼리프 오스만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그를 반대하는 이슬람인들이 늘어난다. 결국, 오스만은 암살당하고 그 자리를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가 차지한다. 알리는 656년 4대 칼리프로 즉위한다. 하지만 그가 무함마드의 사위라는 이유로 칼리프에 즉위한 것을 불만 품는 세력이 생겨난다. 정통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정치이고 이것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칼리프라고 생각하는 세력이었다. 이 세력의 선두에 암살당한 오스만의 사촌 우마이야조가 있었고, 4대 칼리프 알리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혼란 와중에 알리는 칼리프 제도 자체를 부정했던 카와지리 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우마이야조가 칼리프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 그의 추종자를 아랍어로 ‘순나’(예언자의 본보기)에서 따온 명칭인 ‘수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알리를 따르던 시아파는 알리가 죽은 이후 잠시나마 칼리프의 자리에 있던 알리의 아들 하산에게 충성을 바치고 이 같은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의 충성은 수니파와의 갈등으로 번진다.
여전한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현재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는 전체 이슬람교도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다수파이다. 스스로를 '정통 칼리프'를 지지하는 정통파라 칭하기도 하죠. 앞서 정리한 것처럼 이들이 시아파와 다른 점은 그들의 지도자 ‘칼리프’의 정통성을 더욱 넓은 의미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종교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면 사실상 누구든지 칼리프, 이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시아파는 이슬람교도의 10% 이하를 차지하는 소수파이다. 이들은 이맘을 이슬람 성법의 문제에 대하여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최고 성직자’라고 생각한다.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를 순교자로 추종하며, 언제가 다시 살아 돌아올 구세주라 여긴다. 수니파와 비교했을 때, 시아파가 여기는 이맘은 조금 더 신적인 의미에 방점을 두고 있다.
중동 지역 내 수니파, 시아파 분포
결국 이 둘이 지금까지 갈등을 겪는 이유는 자신들의 지도자, 이맘에 대한 정통성을 어디까지 허용하느냐 때문이다. 물론 지정학적으로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품고 있는 중동 지역에서 이것만을 갈등의 요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과거 이라크에서 소수에 해당했던 수니파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다수의 시아파를 억압하면서 폭정을 일삼았던 점이나, 주변 수니파 이슬람 국가와 시아파 중심 국가인 이란이 아직까지 갈등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랜 과거부터 내려온 수니파와 시아파의 반목은 중동, 그리고 이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