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쿠테타, 비상계엄 확대
5·17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1980년 5월 17일 24시부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국회 폐쇄·국보위 설치 등의 조치를 내리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구금했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비상계엄 기간 제5공화국 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인권유린·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이 사건은 1997년 12.12, 5.18 사건 재판 당시 사건명칭인 5·18 내란 사건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기간은 10·26 사건부터 이 사건이 발생한 시간까지를 가리킨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신군부는 1980년 5월 20일 임시국회가 개회되면 정국 장악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여,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는 5월 20일 이후에 시행하겠다던 당초 계획을 수정하고 시국수습방안을 17일으로 앞당겨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5월 17일 9시 30분경 전두환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을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보내, 시국수습방안을 자신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이니 대통령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 결의사항이라고 말하라고 요구했다. 17일 오전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전국 보안부대에 17일 24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니 학생 등 시위 주동자들을 일제 검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17일 정오 신군부는 정부로부터 계엄 확대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었다. 노태우·정호용·황영시 등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확대 방안을 역설했으며,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통한 군의 정치개입을 결정하도록 유도했다. 17일 오후 5시 전두환, 주영복 등은 전군의 일치된 의견임을 내세워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시국수습방안의 '비상계엄 전국확대'·'국회 해산'·'비상기구 설치'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17일 오후 9시 중앙청에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하고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상황 속에서 국무회의가 열려 특별한 토의 없이 비상계엄 확대안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5월 17일 24시 부로 비상 계엄령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대학교 휴교령·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벌인 불법조치였다. 5월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점령한 뒤 무력으로 봉쇄했고,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직전, 보안사에서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하면서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 역시 가택연금 처분내리는 정치 탄압을 감행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국회와 정부에 의해 진행된 개헌 논의가 중지됐다. 서울의 봄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전라북도 전주 소재 전북대 학생회관 3층에서 유인물을 작성중이던 전북대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열사가 전북대에 침입하여 학생들을 연행하던 금마 7공수부대원에게 정수리를 개머리판으로 가격 당하였고 이로인해 죽음에 이르러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