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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추모일과 사건 배경

nyd만물유심조 2017. 4. 25. 22:43

 

 

 

 

 

홀로코스트(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추모일인 4월24일(현지시간) 독일의 지그마르 가브리엘 외무장관이 이스라엘을 방문, 예루살렘 소재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추모관에서 불을 밝히며 묵념하였다.

 

홀로코스트(Holocaust, 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히브리어: השואה, 이디시어: חורבן)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배경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은 종료됐으며,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에게는 해당되지 않았고,[3] 식민지를 빼앗긴 독일의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때마침 프랑스에서는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했고,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에는 반유대주의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지만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그 정도의 반유대주의 감정은 유럽 대륙에서 흔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감정을 처음 접했을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며,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5]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나치당에 가입하면서 반유대주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따라, 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을 독일인이 아닌 다른 구성원들에게 찾아야만 했는데, 그 목표가 바로 유태인이었다. 히틀러의 이론에 따르면 전쟁에서 진 이유는 유태인의 배신과 무능 때문이었다. 유대 자본은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유대 자본 흡수를 위해서라도 히틀러에게 반유대감정은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1929년,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전부터 쌓여왔던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히틀러는 연설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